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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2662
한자 洪重徵
영어음역 Hong Jungjing
이칭/별칭 석여(錫餘),오천(梧泉),양효(良孝),홍중흠(洪重欽)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제주목사
성별
생년 1693년(숙종 19)연표보기
몰년 1772년(영조 48)연표보기
본관 풍산(豊山)
대표관직 병조정랑|사헌부장령|제주목사|형조참판|승정원승지|한성부우윤|지중추부사|공조판서

[정의]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석여(錫餘), 호는 오천(梧泉), 초명은 중흠(重欽), 시호는 양효(良孝). 아버지는 형조판서 홍만조(洪萬朝)[1645~1725]이다.

[활동사항]

1713년(숙종 39) 증광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723년(경종 3) 7월 병조정랑에서 경기도 마전군수로 전출되었고, 1728년(영조 4)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1738년(영조 14) 10월 이희하(李希夏)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고 1739년(영조 15) 9월에 신병으로 인하여 떠났다.

제주목사에 부임하자 흉년이 들어 조정에 진휼을 요청하였다. 조정에서 공급된 나포미(羅舖米) 3천 5백 석, 상진황모(常賑還麰) 5천 석, 저치미(儲置米) 1천 5백 석, 씨콩 7백 석을 도민에게 나누어 주고 후일 상환하도록 하였다. 유생들을 예의로서 대접하고 향교의 「청금생안(靑衿生案)」을 마련하여 토목 역사 등을 면제해 주었다.

제주목사를 떠난 이후 병조참지, 승정원승지, 한성부우윤, 형조참판, 호조참판을 거쳤다. 1753년(영조 29) 노인직으로 지중추부사가 되었고, 1754년(영조 30) 공조판서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저술 및 작품]

문장에 능하였고, 만년에는 주역을 연구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편저에 『완악편(琓樂編)』·『경사증역(經史證易)』·『좌역삼증(左易三證)』·『사평(史評)』 등이 있다. 또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에 있는 용연 바위에 ‘취병담(翠屛潭)’이라 음각된 마애명(磨崖銘)이 남아 있다.

[상훈과 추모]

후일 도민들이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비(碑)를 세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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