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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옥년 할머니의 일생 의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2025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
집필자 현혜경

일본에서의 혼인

신옥년은 10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13년을 일본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본에서 혼인을 했다. 시댁은 래물이라 불리는 제주시의 사수동 지역이었지만 시댁 식구들이 일본에 살고 있던 같은 교포였다. 큰오빠의 올케가 래물 출신으로 시댁은 올케의 집과 앞, 뒷집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댁 쪽에서 올케에게 신옥년이 ‘얌전해 보인다’고 중매를 부탁해서 열아홉에 혼인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나이 열아홉 혼인은 다소 늦은 나이였다고 한다. 대부분은 열일곱, 열여덟에 혼인을 했다고 한다. 북한에 간 작은 언니가 스물한 살에 혼인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혼인이 조금 늦었졌다고 한다. 당시(1940년대) ‘어디에 혼기가 찬 여자들이 있다’고 하면 아들 있는 집안에서 어른들이 ‘새각시’를 찾아보기 위해 방문을 하곤 했는데, 신옥년의 경우도 방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작은언니는 보지 않고 자기와 동갑내기 사촌과 조카딸들만 보고 가서 언니의 혼인이 늦어졌다고 한다. 신옥년이 혼인할 당시 남편은 고순언으로 나이는 스물 둘이였다. 혼인은 한복을 입고 유교식 혼례를 했다. 일본에서도 3일 잔치를 했다. 어려운 때이기는 했지만 시댁 형편이 처가 쪽보다 나아서 시어머니가 혼인 전부터 소면(우동)을 몇 상자나 가져다주고 했다고 한다. 혼인 후에도 일본에서의 삶은 시댁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결혼식 그리고 귀국

일본에서의 혼인식이여서 제주에서처럼 돼지를 추렴하기 위해 온 동네 사람이 모일 수 없었던 관계로 식육점에서 삶은 돼지고기를 사다가 집에서 지은 밥과 함께 ‘가믄잔치’라고 해서 혼인식 전날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손님을 대접했다고 한다. 그리고 혼인식 날은 간단히 전통 유교 혼례 의식으로 혼인을 치르고 바로 뒷날 시댁으로 들어가는 게 당시 일본에서 제주 사람들이 하는 혼인 방식이었다고 한다. 오늘날과 같은 신혼여행이라는 것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간혹 있었다 해도 일본인들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였다고 한다.

일본에서 신옥년 나이 스물 한 살인 1943년에 큰 아들(현 65세)을 낳았다. 그러다 해방이 되었다. 작은언니와 달리 신옥년은 해방이 되고 나서 1년 후에 제주로 들어왔다. 일본에서 큰 아들을 낳고 두 번째 아들을 임신한 상태였는데, 패전 후라 일본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먹을 것도 해결할 수 없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때 일본에 함께 있던 시어머니가 남편과 함께 신옥년과 아들을 모두 고향으로 보내서 지금의 용담1동에 와서 정착하게 되었다. 시아버지는 일본에서 죽어 유골로 제주 땅을 밟았고, 시어머니는 제주로 귀국해서 2-3년을 신옥년이 모셔 살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직도 일본에는 남편의 동생 둘과 동서 셋이 살고 있다고 한다.

여섯 명의 자녀와 열 명의 손자

신옥년은 6남을 낳았다. 큰아들은 일본에서 혼인해서 스물 한 살에 낳았고, 둘째 아들은 3년 뒤, 해방 후 1년 뒤인 1946년에 배 속에 있는 상태로 제주에 귀국하여 친정집에서 낳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에 다시 세 번째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 세 번째 아들은 일본에서 철도청에 근무하다 사고로 죽어버렸다. 그때 그 사고로 일곱 명이 죽었다고 한다.

지금은 자식들이 모두 한국에 있다. 큰 아들은 현재 65세로 교육청에 근무하다 정년퇴직을 해서 도남동에 살고 있다. 둘째는 이제 62세인데, 용담에 살면서 직장을 다니고, 다섯째는 서울서 은행을 다니다 서울 여자와 혼인을 해서 살다 제주로 발령이 나서 신제주 쪽에 살고 있다고 한다. 여섯째는 서울서 기업은행을 다니다 제주은행에 다니는 여성과 혼인하여 서울서 살고 있다고 한다. 손자는 각 아들당 2명씩 낳아서 10여 명이란다. 아들의 어릴 적들을 기억해 보면 장남이 동생들에게 아버지처럼 매우 엄격했던 것 같다고 회상한다. 가끔은 군대식으로 동생들을 휘어잡아 신옥년이 아들들을 달래느라고 애를 먹기도 했다고 한다.

자녀들의 혼인

신옥년의 큰아들은 서귀포에 있는 한 학교 서무과에서 처음 근무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연애를 했다. 부모에게는 ‘서귀포 여자는 느리고, 그곳 사람들도 노름이나 좋아해서 서귀포 여자와는 혼인하지 않겠다’며 서귀포 여자와의 중매를 완강하게 거부하던 큰아들은 결국 서무과에 같이 근무하던 서귀포 여자와 혼인을 했다.

둘째도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시험에 떨어진 뒤 기술을 배우겠다며 서울에서 기술학교를 다니다 하숙집 딸과 연애를 하여 혼인을 했다고 한다. 넷째도 오현고를 졸업한 뒤 샷시문 공장을 차려서 운영도 해보고 토끼도 사육해 보고 하다 양장점을 하는 여자와 연애 후 혼인을 했다고 한다. 다섯째는 처음 서울에 상경해서는 보험회사(대한생명)를 다녔는데, 그곳에서 지금 처의 언니가 소개를 해서 혼인을 했다고 한다. 며느리 될 서울 여자가 아들과 함께 제주 집에 왔을 때, 지금의 며느리가 당차게 “어머니 저 어떠세요?”라면 물었단다. 그래서 ‘느네만 좋으믄 되어졌(너희들 서로만 마음에 들면 된 게 아니냐)’하고서 허락을 하였다는 것이다.

다섯째 아들은 부모가 서울로 상경해서 사돈과 상견례를 했으면 했고, 신옥년은 유독 당시 집안이 어려운 때라 일 나간 동문시장 그릇집에서 1백만 원을 빌려서는 아들 둘을 데리고 다섯째 아들의 양가 상견례를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고 한다. 당시 집안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역사를 다 썽 놔두문 아기덜고라 안라도 나 눈아분 후제, 우리 어멍이 영행 살았구나(내가 살아온 어려움을 다 써 두면 자식들에게 말하지 않아도 내가 죽은 후에 우리 어머니가 이렇게 어렵게 살았구나)”하고 이해했으면 한다고 한다. 다섯째 아들의 혼인은 결국 서울서 이뤄졌다. 제주에서처럼 3일 잔치를 하지 않았고, 하루 안에 예식장에서 혼인식과 식사를 대접했다고 한다. 예식장비는 아들과 며느리 쪽에서 반반 부담을 했는데, 제주에서의 풍습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고 한다. 혼인식 경비는 아들이 직접 마련하였다고 한다. 그때도 너무 어려운 때라 아들과 며느리에게 ‘돈 십원을 주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그냥 간 ‘빈 손’이 부끄러워 사돈에게는 거짓말로 ‘제주도에서 이제 친척들이 잔치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했다는 것이다. 아들이 그 마음을 알았던지, 아들 내외는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간다고 하고서는 제주 집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살기 어렵지만 해준 자식들 돌잔치

신옥년은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백일 잔치를 하지 않았다. 돌잔치라는 것도 신경 써서 차려내지는 못했었다고 한다. 그냥 식구들과 같이 밥이나 먹는 게 전부였다고 한다. 그가 볼 때 돌잔치라는 것도 자기 손자들이 태어나던 1970년대부터나 화려해졌다고 한다. ‘애기덜 생일날 때리지만 안허여도 좋아, 몰랑으네 무시거 시켱 말 안들으믄 막 때려불고, 난 경해나서’라고 말하면서 크게 웃으셨다. 이야기인 즉 1970년대 이전에 제주에서는 생일이나 돌잔치를 그리 잘 챙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일날인 줄도 모르고 말을 심부름 시킨 일을 잘 하지 못했다고 자식들을 생일날 때리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지나고 보니, 아련한 추억 한 켠인 모양이다.

반면 그의 경험상 육지 사람들은 굶어도 돌잔치는 신경 써서 하더라는 것이다. 인근에 교사로 와서 살던 육지 사람이 자식이 여섯 명이었는데,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었는데도, 아들 돌잔치를 위해서 남의 밭의 익은 보리를 한포대나 꺾어 왔던 적이 있더라는 것이다. 그때 신옥년은 ‘남의 밭에 들어가서 그렇게 하면 큰일 난다’고 타이르면서 ‘다음에는 다시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또 그런 일들이 일어나더라는 것이다. 그는 그 당시 일을 어이없어 하면서 ‘그걸 볶아 먹었는지, 삶아 먹었는지……’하시며 웃는다.

손자들의 돌잔치

신옥년은 손자들의 돌잔치(대략 1970대~1990년대까지)는 고운 옷을 입히고, 마당에 한 상 가득히 차려서 치렀다고 한다. 음식 외에도 연필, 공책, 명주 실 등을 함께 상에 진열했는데, 아기가 가장 먼저 잡는 물건을 통해 아기의 미래를 예측하기도 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연필을 잡으면 공부를 잘 할 것이고, 실을 잡으면 명이 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이때쯤부터 친척 정도나 돌잔치에 왔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요즘 돌잔치를 한다고 친구뿐만 아니라, 이웃들에게도 야단스런 홍보를 하는 사례들을 보면 돌잔치의 원래 의미가 많이 퇴색되는 듯 하다.

용담동의 혼인식

신옥년이 해방 후 용담1동에 돌아와서 보니, 여전히 3일 잔치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잔치가 다가오면 잔치를 준비하는 집에서는 미리 자기 집에 돼지를 길렀고 자기 집의 돼지를 잔치 이틀 전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도새기 추렴(돼지 잡기)’을 하더라는 것이다. 혼인식날 신랑 쪽에서 신부를 데리러 갈 때 신랑쪽에서 이바지 음식으로 준비해 가져가는 것이 돼지 한 마리와 계란 1백 개에서 2백 개 정도, 닭 두 마리, 술 한병이었던 시절이라, 돼지고기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고 한다.

잔치가 되면 신랑은 말을 타고 신부집에 가서 혼인식을 하고 가마에 신부를 데리고 시댁으로 왔다고 한다. 육지와 같이 ‘함’을 파는 행위는 없었고, ‘함’이라고 해도 조그만 상자에 여러 종류의 옷감 정도를 넣고 여자 하인이 등에 지고 말을 타서 신부집에 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신부집에 당도해 그 함을 내려놓으면 그 상자 안에 예장 써 놓은 것이 있는데 그 함에 들어있는 예장글귀가 틀리거나 좋지 않으면 그것을 고칠 때까지 신랑을 대문 밖에 몇 시간이고 세워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함이 신부집에 갈 때에는 집안에서 한학을 잘하는 사람이나 학식이 있는 사람이 동행했다고 한다. 그래야 대문 밖에서 바로 고치고 신부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런 행위는 상대 집안의 학식을 보기 위한 하나의 행위이자 자신의 집안이 지체 있는 집안인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예물과 예단

그렇다고 상대 집안에 선물을 하는 예단이나 예물이 까다로웠던 것 같지는 않다. 예물이나 예단이라고 해보아야 다들 경제사정이 좋지 않은 때라 신랑 쪽에서는 신부의 의복을, 신부 쪽에서는 신랑의 이부자리 정도나 했다고 한다. 신옥년의 어머니도 이 이부자리를 마련해줬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충분한 선물을 마련할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정월 초하루가 되어가면 며느리들은 시댁 친척분들의 버선을 손수 만들어 준비해서는 설 선물로 드렸다고 한다. 신옥년도 일본에 있을 적이었지만 친정어머니에게 광목 한 통만 사서 보내달라고 해서 버선을 손수 만들어서 친척분들에게 모두 돌렸다고 한다.

시집살이

신옥년은 옛날에는 며느리들의 일에 엄중하고 호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며느리들은 ‘쳇방’에나 앉아서 밥을 먹으려 해도 밥 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신옥년이 시집 갔을 때(1940년대), 남자들은 ‘성산문’이라고 해서 남자들이 앉는 자리가 있었는데, 그 곳에 앉아 천천히 밥을 먹었다고 한다. 식사 후에는 시아버지가 ‘흠’ 하는 헛기침을 하면 며느리가 알아듣고 어서 숭늉을 대접해야 했다고 한다. 그때는 무쇠솥에 밥을 했기 때문에 밥을 긁어내고 난 뒤 물을 부어 구수한 숭늉을 만들어 시아버지께 바쳐야 했다고 한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집에 들어가려면 아무 문으로나 들어갔지만, 그 당시 여자들은 부엌을 통해서만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여자들은 앞 문으로 함부로 드나드는 게 아니라고 해서 금기시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필자도 어느 아주머니가 이웃집을 찾아갔을 때 부엌쪽 문으로 가서 ‘○○엄마 있어요?’하고 부르던 생각이 미친다. 여자들은 부엌을 통해서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규칙이 아직도 어른들 몸에는 남아있는 듯 하다. 그때 시집간 여자들은 서로의 삶을 이해하면서 나물이라도 같이 나눠먹고, 내 것, 네 것 하지 않고 인심이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잔치가 있는 집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두 모여 일은 나누고, 축하는 두 배로 해주었다고 한다.

아버지 환갑잔치

많은 잔치 중에 환갑잔치는 가장 큰 잔치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환갑이 되었다고 환갑잔치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자식 복이 있고 집안이 살만한 집안 사람들이나 했다고 한다. 그래도 용담1동에는 부자들이 많아서 환갑잔치를 크게 한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신옥년의 부친의 환갑 잔치도 크게 했다고 한다. 당시 신옥년은 일본에 살고 있을 때였지만, 일본에서 명주로 도포 등 몇 벌의 옷을 지어 제주에 있는 부친께 보냈다고 한다. 그때 옷바느질은 일본에 같이 살고 있는 이모 딸이 옷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부친의 환갑잔치는 마당에 천막을 치고 친구들을 초대해서 장구를 치고 ‘얼씨구나 좋다. 절씨구나 좋다’ 하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겁게 진행되었다고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 일본에서는 대부분 고향을 그리는 노래나 신세타령 노래를 부르며 지냈다고 한다. 부친의 환갑잔치 사진도 몇 장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진들은 후에 큰 올캐 언니에게 주었다고 한다.

조모의 장례식

신옥년이 상장례에 대한 기억은 조모의 장례식에 대한 것이었다. 조모가 돌아가시자, 친척 한 사람이 돌아가셨다는 부고 내용을 여러 장 적어서 봉투에 넣고는 제주섬 전체를 돌아 친척집에 부고를 알리는 서신을 띄웠다고 한다. 전화도 없고, 전신도 여의치 않을 때라 친척 몇 사람이 걸어서 섬 전체를 돌아 부고를 알렸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러다 보니 그 당시는 보통 5일장이나 7일장을 지냈다고 한다. 요즘처럼 3일장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상장례가 나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상가 집을 도왔다고 한다. 당시에는 여자들도 모두 장례에 나와서 ‘설대’를 메고, 양쪽으로 서서 장례지까지 동행했다고 한다. 장지는 요즘처럼 공동묘지가 아니라 ‘정시’라 불리는 지관을 모시고 ‘산터(묘지)’를 보러 며칠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대부분은 그 산터가 한라산 지경이 많아서 마을서부터 꽤 거리가 있었다고 한다. 또는 남의 밭에도 묻기도 했는데, 지관이 산터가 좋다고 하면 남의 밭을 빌어서 묻기도 했다고 한다. 보통은 30평은 족히 들었다고 한다. 신옥년 시조모가 사망했을 때에도 육지에서 데려온 지관이 산터를 지정해준 대로 한라산 지경에 묻혔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신옥년의 시아주버니 자손들이 아주 잘 되었다고 한다. 가끔 사촌 시동생이 ‘너무 멀어서 거기로 벌초를 가는 것도 귀찮은데, 이젠 가족 공동묘지를 해놓았으니 할머니도 여기 모셔다 놓자’고 한단다. 그때 마다 신옥년은 ‘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못 모신다’고 이야기 한단다.

제사와 재산 분할

신옥년의 집의 경우 제사는 분할하여 봉행해 왔다고 한다. 시할아버지와 시할어머니의 제사는 신옥년의 남편이 이미 사망했기에 일본에 사는 남편의 형제들이 나누어서 하고 있다고 한다. 남편의 동생은 시어머니 제사를 맡고 있다고 한다. 신옥년의 장남은 정월명절과 시아버지 제사를 맡고 있다고 한다. 차남은 팔월 추석을 맡아서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신옥년 언니의 경우 아들이 한 명이라 1년에 여덟 번의 제사를 맡아서 한다고 한다. 그래도 군소리 하나 없다고 칭찬을 했다.

제주시 쪽에서 제사는 모든 자식들이 나눠서 지낸다고 한다. 남제주군(현 서귀포시)쪽은 장남이 모두 제사를 맡아서 한다고 들었지만, 제주시나 북제주군(현 제주시)은 모든 자식들이 제사를 나누어서 지냈다고 한다. 부친의 제사는 장남이 맡아서 하고, 모친의 제사는 차남이 했다고 한다. 혹 아들이 많으면 조부의 제사는 장남이, 조모의 제사는 차남이, 부친은 삼남이, 모친은 사남이 하는 식으로 했다고 한다. 이때 제사에 따라 재산도 거의 똑같이 나누었다고 한다. 다만 장남에게는 조금 더 얹혀주었다고 한다. 때때로 친정에서 물려받은 재산이 있다면 그 재산은 딸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제사에 따르는 경비와 노력에 대한 댓가가 재산 분할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남편이 죽었을 때 신옥년의 큰 아들이 ‘아버지 모시던 제사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오자 ‘일본서도 우리가 쭉 해왔는데, 우리가 해야지 않겠는냐’며 둘째 아들에게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는 것이다. 제사 때가 되면 제사비용으로 40만원이나 50만원 주는데, 제사를 하지 않는 친척들은 5만원 정도의 부조를 제사집에 한다고 한다.

제사와 육지 며느리

그렇다 하더라도 제사를 차리는 일은 번거로운 일임에 분명하다. 한번은 신옥년의 며느리가 제사를 준비하면서 군소리를 하자, 신옥년은 ‘군소리 하면 덕이 하나도 안온다’며 군소리를 하지 말라고 타일렀는데도 궁시렁거리자 그는 화가 나서 “육지사람 예의 바른댄 행게 너 행실이 그거냐?(육지사람들이 오히려 예를 더 잘 안다고 하는데, 너는 배운 게 없는 행실이구나)”라며 야단을 쳤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후 신옥년이 일을 하러 집을 비울 때, 마을 사람들이 시아버지에게 대접을 잘 안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시부모 대접하는 걸 개 밥주듯이 뒷전으로 하는 것이 육지사람 하는 것이냐? 육지사람 예의 바르다고 해서 너를 시집오게 했는데……”하며 한바탕 호되게 더욱 야단을 쳤다고 한다. 그 후 신옥년은 “덕이 오는지, 안오는지 몰라도 너도 누구네 집에 가서 기분 나쁜 척 하면 거기 음식을 먹고 올 수 있겠느냐? 마음을 곱게 먹고, 집에 온 손님에게도 잘 대접해야 기분이 좋아서 돌아가고, 귀신도 좋아할 일이다”며 타이른 후 며느리는 아주 달라져 지금은 잘 하고 있다고 한다.

고기적과 남자

제사를 지내게 되면 제숙을 마련해야 했는데, 적갈은 주로 돼지고기나 상어고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부자집이야 쇠고기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집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고기 다루는 일은 전부 남자들이 했다고 한다. 요즘처럼 여성들이 다루지 않았다고 한다. 왜 남자들이 했는지는 정확히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 때문에 빚어진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었다. 신옥년이 해방 후 일본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서 래물에 사는 큰 시댁에서 신옥년에게는 시조부되는 분의 제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 시댁의 큰 집은 아들이 하나인데, 제주시에 와서 살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제사집에 가기 위해서 신옥년의 가족들이 그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큰 집 시가 어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아이고, 무사 안 왐시(아이고, 왜 안 오지)?”하더라는 것이다. ‘무슨 일이냐고’하자, “아이고, 와사 적갈을 헐 걸……(아이고, 아들이 와야 적갈을 장만할텐데……)”하며 아들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제밥과 그릇

신옥년의 시가 큰 집에서 모시던 시조부 제사에서는 제사 밥을 모두 ‘도구리나 양푼’ 같은 큰 용기에 담았던 모양이다. 그러다 신옥년이 제사를 맡아온 후로 놋그릇을 마련해 하나씩 하나씩 담자, ‘궨당(친척)’ 한분이 말하기를 “영 허믄 자손 불어나지 않는다. 멥밥을 하영 갈르믄 자손 안 불어난다(이렇게 따로 담으면 자손이 불어나지 않는다. 제사 밥을 많이 나눠 담으면 자손이 불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자식이 많이 불어났다며 웃는다. 그 후 놋그릇은 일명 ‘스댕그릇’이라고 하는 스테인레스 그릇으로 모두 바뀌었다고 한다. 이 스텐인레스 그릇으로 사발 50개, 국그릇 50개를 마련해서 사용했었는데, 이제는 모두 사기 공기그릇으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 중에는 이 스태인레스 그릇을 절에 가져다 주는 사람들도 있고 치워버리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신옥년의 경우도 며느리가 집에 있어봐야 어지럽다고 고물장수에게 넘겨버렸다고 한다.

떡반 태우기

그러면서 제사 음식을 나눠주던 관습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회상했다. 예전에는 제사를 지내고 나면 제사 음식을 마을에 전부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파제한 뒤 새벽 한 시쯤에 문을 두드리면서 “제 파제 행 가져와수다. 식게밥 아져와수다” 하면 모두들 일어나서 그 반을 받아두었다고 한다. 대소상을 치르고 난 뒤에도 한두기 동네까지 떡반을 나눠주었다고 한다. 신옥년의 조모가 돌아가신 후 대소상 때에도 한천다리 바위 근처에 살고 있던 집까지 떡반을 태우러(나눠 주러) 갔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제사를 지내는 집은 떡을 몇 시루나 쳐내서 송편을 만들고 제사음식으로 만든 다른 음식도 같이 넣어서 그걸 모두 태웠다고 한다. 혹여 상이 나서 아직 탈상을 하지 않은 집은 따로 망자의 상에 올릴 떡반과 술을 더 가져갔다고 한다. 그때도 삭제와 망제를 모두 할 때였다고 한다.

설과 추석 준비

신옥년의 부친이 살아있을 동안 설 차례와 추석 차례를 신옥년이 살고 있는 현재의 집에서도 모두 치렀다고 한다. 친척들이 많다보니 30명 내지 40명이 찾아왔다고 한다. 이때 방문하는 친척들은 멥쌀과 제주들을 들고 찾아왔다고 한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번거롭다고 쌀을 들고 오는 대신 1만원 정도를 봉투에 담아 명절음식을 차리는 집에 주었다고 한다. 때문에 한 차례 명절에 들어오는 돈이 30만원에서 40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도 예전 예의를 지킨다고 돈 봉투를 담아오면서도 제주(祭酒)도 같이 가져오는 친척들이 있다고 한다. 시댁의 명절은 네 군데서 치렀는데, 시아버지가 4남매이다 보니 네 군데에 가서 명절의례를 치렀다고 한다. 이전에는 명절 음식도 반을 나누고 했지만, 이제는 연장자가 있는 곳만 반을 싸고 나머지는 반을 나누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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