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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열 할머니의 직업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3014
한자 -職業-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집필자 김미진

직업으로서의 해녀

해녀 직업이라는 게 남들은 천하다고 하지만 자본 안 들어서 돈 벌어 살 수 있다면서 남편이 죽고 아이들 다 키운 것이 해녀 직업이라고 해녀 일에 대한 자부심을 보였다. 남편이 죽고 본격적으로 서부두에서 물질을 다시 시작했을 때도 물론 상군 노릇을 했다. 탑동에서는 천추(우미)가 많이 나왔었다. 옛날에는 미역과 우미가 주로 작업 대상이었고 20여 년 전부터 소라도 수출이 되고, 횟집도 생기고 관광객들도 많이 오면서 전복, 소라 같은 것 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고 했다. 옛날에는 전복, 해삼, 소라도 많았는데 소라는 돈이 얼마 안 되어 그냥 버렸었다. 해삼도 바구니로 건져왔었다. 수출하기 시작하면서 해산물 값을 잘 주기 시작했다. 소라 값이 수출할 때는 밀감 값 못지않게 주었다. 지금은 1㎏에 4000원, 3500원 정도이다. 해삼은 1㎏에 2만원, 전복100g에 12000원 한다. 며칠 전 500g짜리 전복을 채취하여 한번에 53,000원을 벌었다고 자랑을 하였다. 운동 삼아 심심하니까 간다는 고시열에게 물질은 아직도 용돈 벌이는 되는 셈이다. 예전에는 시장에 직접 팔러 다니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횟집과 연계해서 해녀 개인별로 거래하는 횟집에 그날 잡은 수산물을 가져가서 팔곤 한다고 했다. 고시열은 40년 동안 탑동의 소라 횟집만을 고집한다. 소라 횟집은 예전에 가게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라(대야)장사를 했었는데 돈을 많이 벌었는지 그 아들이 가게를 차렸다. 특별히 다른 횟집으로 옮길 필요도 못 느끼고 예전에 거래했던 곳이니 계속 애용한다고 했다. 단골이므로 소라 하나만 잡더라도 거래를 해준다고 했다.

해녀 입문

고시열은 어머니가 물질을 나가면 7·8세쯤 바닷가에서 놀면서 물질을 배웠다고 한다. 정식으로 수영을 배우거나 전복 소라 캐는 법을 배운 것은 아니라고 했다. 어머니께 졸라서 눈(물안경), 테왁, 망사리를 만들거나 사달라고 졸라서 그것을 갖게 되면 낮은 물에서 어머니 흉내를 내면서 연습하다보니 해녀가 되었다고 했다. 테왁은 박 속을 긁어서 만들었다고 하나 직접 만들어 사용하지 않고 동네마다 돌아다니는 장사가 있었다. 테왁 장사에게 어린이용 작은 테왁을 사주면 튜브를 대신하여 바닷가에서 그것을 가지고 놀았다. 어른들 흉내를 낸다고 해초들을 뜯어 집에 가지고 가면 거름으로 쓰기도 했다.

처음으로 돈을 번 물질은 15살 때이다. 동네에서 육지 물질 갈 해녀를 모집하자 어른들을 따라 육지 물질을 처음 다녀왔다. 화물선에 몇 마을 해녀와 쌀을 싣고 갔는데 3천원을 벌고 옷도 사 입고 돌아왔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 때 주로 미역을 많이 캐었었는데 어른들이 조금씩 도와주었던 것 같다고 했다. 3천원도 그 때는 큰 돈이어서 어머니께 3천원을 드렸더니 우리 딸이 돈을 벌어 왔다고 동네에 자랑을 하고 다녔다.

상군해녀

어린 해녀들이 더러는 있어도 어른들을 따라가지 못했으나 18살에 상군해녀가 되었다는 그녀는 어른 해녀들이 하는 만큼의 일을 따라 가서 ‘애기상군’이라 불리었다고 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상군해녀라는 말이다. 금릉에서도 물질을 잘해서 미역을 팔아 돈을 많이 벌었다. 금릉에서 해녀 일을 할 때는 비양도까지 배를 저어 가서 작업을 했는데 배를 타면 노 젓는 것도 고시열에게 시켜줘서 ‘이어도사나’ 노래를 부르던 것을 기억했다.

부산에 살 때도 물질을 하곤 했는데 영도다리에서 나와 수산대학 있는 곳에 가서 물질을 하곤 했다. 부산의 바다와 제주의 바다가 어떻게 다른 가 했더니 부산의 바다는 주로 먹돌로 동글동글한 반면 제주바다는 울퉁불퉁한 자연석이라서 바다 밑 광경이 제주바다가 훨씬 멋있다고 했다. 또한 부산에 있을 때 독도에 가서 6개월을 살면서 천추(우미)와 미역을 많이 했었다. 그때는 소라나 전복 보다는 미역과 천추가 값을 쳐줄 때였다고 한다. 수확량에서 먹고 자는 것을 뺀 나머지 금액을 돈으로 받았다.

나이든 해녀

재작년까지만 해도 젊은 해녀들과 같이 작업을 했었으나 작년에 몸이 아픈 이후로는 가까운 데서 작업을 한다고 했다. 나이가 든 해녀는 힘이 없어서 근처의 가까운 곳만 갔다왔다 해서 며칠 전에는 1,500원 벌어왔다. 그래도 할망 해녀 중에서는 아직도 그녀가 상군해녀라고 했다. 건입동해녀탈의실에는 다섯 명의 나이든 해녀가 있는데 87세, 85세, 73세, 72세 그리고 그녀 다섯인데 그 중에서는 아직도 제일 잘한다고 했다.

해녀들의 쉬는 날

원래 해녀들은 쉬는 날이 없이 1년 365일 바다 속에 들어간다. 그러나 서부두 탈의실 해녀들은 8, 9, 10물에는 작업을 쉰다. 음력으로 보름과 초하루부터 이틀 정도를 물질을 하지 않는다. 물때가 맞지 않아서 해산물이 많이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물때가 좋을 때는 하루 10시간도 작업을 하지만 물때가 좋지 않으면 3~4시간 만에 나오기도 한다. 젊었을 때는 바닷가에서 500m 이상 헤엄쳐 나가서 작업을 했다. 보통 전복은 한손에 하나, 소라는 여러 개 갖고 나온다.

해녀복

고시열이 처음 물질을 시작했을 때는 속적삼 하나만 입고 물에 들어갔었는데 추워서 오래 작업을 할 수 없었다. 고무 옷이 나와서 지금 이 나이에도 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고무 옷 난지가 20년 더 되었는데 이 나이에도 바다에 갈 수 있다. 시에서 고무 옷 보조가 나와서 24만원짜리를 8만원 자체부담하면 살 수 있다. 옷을 입을 때는 먼저 학생들이 신는 검은 스타킹을 먼저 입고 그 위에 티셔츠를 입고 고무 해녀 옷을 입는다. 손에는 면장갑을 끼고 겨울에는 고무장갑을 먼저 끼고 면장갑을 낀다. 머리에도 고무 옷을 쓴 후 물안경을 끼는데 예전에는 수영할 때 끼는 수경처럼 두 쪽으로 되어 있는 작은 안경을 썼으나 40년 전 쯤 큰 물안경이 나와서 더 멀리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처음 해녀 일을 배울 때만 작은 물안경을 썼고 작업을 할 때는 계속 큰 물안경을 썼다고 했다.

불턱

옛날에는 옷 벗어 물에 들어갔다 오면 추우니까 ‘불턱’이라는 곳에 모여 앉아 불을 쬐곤 했다. 자기가 불을 땔 나무는 직접 가지고 와야 하는데 지들캐(땔감)나무를 많이 가져오지 않으면 왕따 시키기도 했다. 옛날에는 불턱의 자리도 등급이 있었다고 하지만, 고시열이 물질을 할 때는 자기 자리를 있긴 했어도 상하 등급에 따른 자리 배치는 아니었다고 했다. 서부두에서는 불턱이 매립하기 전에 있었는데 그냥 바닥에서 몇 해 불을 때다가 커다란 쇠깡통에 나무를 집어넣어 불을 지피고 그 불에 물을 덥혀 대야에 물을 떠 놓고 바다 냄새를 대충 씻곤 했다. 20여년 전에야 해녀 탈의실이 생겼다.

탑동 매립

탑동 매립 전에는 길 바로 옆이 바다였는데 날씨가 안 좋은 날은 파도악 올라와서 그 쪽으로 다니지도 못했다. 매립한 바다는 전복 해삼이 많이 나던 좋은 바다인데 이제는 바다도 죽고 아무것도 안 나서 멀리까지 물질을 가야한다. 그 때는 바다도 얕고 썰물 때 물이 빠지면 오분자기, 소라, 보말 들이 널려 있었다. 범양 회사에서 매립을 하겠다고 하고 제주시에서 허가를 내주었지만 해녀들은 반대투쟁을 했었다. 더러운 물이 바다로 내려온다고 해녀회에서 반대투쟁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보상금 얼마씩 받고 끝냈지만 지금도 매립을 하지 않았으면 돈을 잘 벌 텐데 바닷물이 깊어지고 해산물도 옛날처럼 많지 않다고 했다.

서부두 해녀탈의실의 해녀회는 회장 외에 간부 대여섯 명으로 구성되는데 고시열은 한 번도 회장은 하지 못했었노라고 했다. 해녀회의 정기적으로 열리는 것은 아니고 일이 있을 때만 소집된다고 했다. 5·6년 전 항만 공사를 할 때도 포크레인 위에 올라가 반대투쟁을 했었다.

직업병-잠수병

해녀생활 50년에 얻은 것은 병 뿐이다. 나이가 들면 여기저기 아프긴 하지만 갑상선 때문에 작년 여름에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났다. 갑상선 때문에 제주대학병원을 한 달에 한번 가고 보통은 집에서 가까운 중앙병원을 이용한다. 가벼운 감기는 노동의원에 가는 편이다.

바다에 들어 갈 때는 뇌선 2개, 개보린, 엑티피드, 위약, 피로회복제 등 한손 가득 약을 먹고 들어간다. 그렇지 않으면 눈도 아프고 머리도 아파서 물질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해녀들은 보통 다 이런 종류의 약을 먹고 바다에 들어가는데 고시열은 특히 더 많이 먹는다고 했다. 남편이 죽고 나서 잠도 못자고 하여 고택수의원에 갔더니 신경안정제를 처방하여 주었는데 그때 이후 줄곧 약을 먹고 있다고 하였다. 이제는 약을 먹지 않으면 심장이 떨려서 안 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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