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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023
한자 政治
영어의미역 politics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경희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에서 지역민을 통해 획득한 권력을 행사하여 지역 발전을 도모하는 총체적 활동.

[개설]

해방 이후 고령 지역에서의 정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의 정치와 정부 수립 이후의 정치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고령 지역에서의 정치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제도화되지 않은 채 다양한 사회단체나 정치 조직에 의해 수행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와 더불어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령 지역의 정치는 주로 국가 기구에 파견할 대표자를 선출하는 선거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현재까지 고령 지역에서는 국회의원 선거 18회, 대통령 선거 11회, 유신 체제 하에서 대통령 간접 선거를 위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3회, 제5공화국 대통령 간접 선거를 위한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 1회, 1952년~1960년 지방 자치 선거 3회, 1991년 3월 26일 고령군 의회 의원 선거 이후 전면화한 전국 동시 지방선거 4회가 실시되었다.

[정부 수립 이전의 정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았고 남한 지역에서는 3년에 걸친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근대 국가의 권력 구조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터라 이 시기에는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조직되었고 심한 사회적 혼란을 빚었다.

여운형(呂運亨)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과 함께 총독부로부터 치안 행정권을 접수받아 그 산하에 보안대, 치안대, 학도대 등을 조직했고 농촌 지역에는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지역 유지들을 참여시켰다. 해방 다음날 고령군에서도 고령치안유지대가 조직되어 지역을 치안을 유지하는 한편 일제의 잔재라 여겨지는 물건은 보이는 대로 파괴하고 철거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이 실시되자 정국은 송진우(宋鎭禹) 등이 연합하여 발족한 한국민주당과 박헌영(朴憲永) 등이 주도한 좌익계의 조선공산당이 양립하여 대립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당시 고령에서는 좌우 대립보다는 오히려 좌우 공존, 좌우 동행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10·1 사건 때 남로당과 민청계 사람들이 군청 등에 진입한 일 외에는 큰 대결 양상을 보이지 않았다.

[정부 수립 이후의 정치]

1. 제1공화국 시기[1948년~1960년]

제1공화국에서는 3차례의 대통령 선거와 4차례의 국회의원 선거가 직접 선거로 실시되었다[제헌 국회의원 선거 포함]. 대통령 선거의 경우, 초대 대통령 선거는 제헌 의원에 의한 간접 선거였으며 제1공화국 하에서는 제2대~제4대 대통령 선거가 직접 선거로 실시되었다.

1952년 8월 5일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고령군의 투표율은 전국 평균 투표율인 88.1%보다 높은 92.0%를 기록했으며 이승만(李承晩) 후보가 유효 투표의 80.0%[17,764표]로 1위를 차지하였다. 1956년 5월 15일 실시된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승만 후보가 전국적으로는 유효 투표 총수의 70%를 획득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고령군에서는 약 51%[10,813]의 지지를 얻는데 그쳤으며 야당 후보였던 조봉암(曺奉岩) 후보가 10,091표로 이승만 후보에 거의 육박하는 지지를 얻었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운동 중 사망함으로써 이승만이 단독으로 출마하여 선출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선거 사상 최악의 부정 선거로 이를 규탄하는 4·19혁명과 더불어 4월 26일 국회의 결의에 의해 무효가 되었다.

국회의원 선거는 모두 4차례 실시되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고령군에서는 예수교 장로회 소속 김상근(金商根) 목사, 민족통일본부 소속 김상덕(金尙德), 한국민주당 소속 곽태진(郭泰珍) 등 3명이 출마하여 김상덕 후보가 당선되었다. 김상덕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했으며 6·25전쟁 때 납북된 이후 현재까지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한농민회 소속 정춘택(鄭春澤), 한국민주당 소속 김상덕, 민주국민당 소속 곽태진, 유도회(儒道會) 소속 홍재영(洪在榮) 등 4명이 입후보하여 곽태진 후보가 당선되었다. 1954년 5월 20일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8명의 후보가 난립했고 선거 결과 자유당 소속 김홍식(金洪植) 후보가 당선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는 반 자유당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실시되었으며 이전과 달리 무소속 입후보자와 군소 정당 입후보자가 많이 줄었다. 고령군에서는 정남택(鄭南澤), 김홍식, 곽태진 3명이 입후보 했고 자유당 공천을 받은 정남택 후보가 당선되었다. 제3대 국회의원이었던 김홍식은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낙선하였다.

2. 제2공화국 시기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이후 출범한 제2공화국 헌법은 내각 책임제를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제2공화국 시기의 대통령 선거는 간접 선거, 민·참의원 선거는 직접 선거로 실시되었다. 1960년 7월 29일 개정된 헌법에 따라 제5대 국회의원[민의원] 및 초대 참의원 동시 선거가 실시되었고 고령군에서는 제2대 국회의원이었던 곽태진, 제3대 국회의원이었던 김홍식, 제4대 국회의원이었던 정남택, 사회대중당 소속의 문규용(文圭鎔) 후보가 경합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김홍식 후보가 민의원으로 선출되었다.

3. 제3공화국 시기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내각 책임제였던 권력 구조는 다시 대통령 책임제로 바뀌었고 헌법과 함께 선거법도 개정되었다. 이에 따라 제3공화국 시기에는 3번의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1963년 10월 15일 실시된 제5대 대통령선거는 5명의 후보가 출마한 가운데 민주공화당의 박정희(朴正熙) 후보와 민정당의 윤보선(尹潽善) 후보 간 대결로 진행되었다. 전국 투표율이 85.0%였던 이 선거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전국 유효 투표 총수의 46.6%를 얻어 당선되었는데, 고령군에서는 64.3%의 지지율을 기록하였다.

1967년 5월 3일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6명의 후보자가 경쟁했고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신민당의 윤보선 후보가 다시 맞붙었는데 박정희 후보가 전국 유효 투표 총수의 51.5%를 얻어 당선되었다. 고령군에서의 박정희 후보 지지율은 67.9%였다. 이 선거에서는 특히 동쪽 지역은 여당, 서쪽 지역은 야당 지지라고 하는 표의 동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신민당 김대중 후보 간의 각축전이었다. 이 선거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전국 유효 투표 총수의 53.2%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고령군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24,020표[득표율 84.4%], 김대중 후보가 4,254표[득표율 14.9%]를 각각 득표하였다. 이 선거에서도 동·서 간의 지역감정이 극심하게 표출되어 경상북도·경상남도·부산·강원도·충청북도·제주도에서는 박정희 후보의 지지가, 서울·전라남도·전라북도에서는 김대중 후보의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군사 정부의 민정 이양과 함께 1963년 11월 26일 실시되었던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선거구를 지역구와 전국구로 구분하여 소선거구 다수 대표제와 비례 대표제를 병용하였다. 또 후보자에게는 정당 추천제를 절대 조건으로 하여 무소속 출마를 금지시켰다. 고령군은 선거구 조정에 따라 달성군과 합하여 경상북도 제8선거구로 확정되었으며 총 6명이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김성곤(金成坤)이 당선되었다.

고령군은 1967년 6월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달성군과 합하여 경북 제8선거구로 확정되었으며 모두 4명의 후보자가 출마하여 김성곤 의원이 압도적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민주공화당 소속의 김성곤은 야당인 신민당의 진출이 두드러진 1971년 5월의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었지만 항명 파동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같은 해 12월 14일 보궐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모두 5명이 입후보하여 민주공화당 박준규(朴浚圭) 후보가 당선되었다.

4. 제4공화국 시기

1972년 10월 유신 이후 국민 투표를 통해 유신 헌법이 제정됨에 따라 제4공화국에서는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 선거로 선출했으며 국회의원은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 선거로 73명, 직접 선거로 지역구당 2명씩 146명을 선출했다. 이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제8대, 제9대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선출하였다. 그리고 1979년 10·26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최규하(崔圭夏)를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한데 이어 최규하의 하야로 전두환(全斗煥)을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973년 2월 27일 실시된 제9대 국회의원 선거는 한 선거구에서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바뀌어 실시되었다. 고령군은 경산군과 달성군을 합하여 경상북도 제7선거구로 확정되었다. 3개 군을 합한 총 선거인 수는 182,754명이었는데 이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은 제8대 보궐 선거에서 당선된 박준규를 후보로 공천했고 신민당에서는 곽태진 전 의원과 제8대 전국구 국회의원이었던 이상조(李相祚)를 복수 공천하였다. 이외에 민주통일당 이형우(李亨雨) 후보, 무소속 박주현(朴柱炫), 김문조(金文祚), 조성기(曺聖基) 후보가 같이 경합했는데 박준규 후보와 박주현 후보가 각각 1, 2위로 당선되었다.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박준규 후보, 신민당 김종기 후보와 박주현 후보, 무소속 나학진(羅學鎭), 이재연(李在淵) 후보가 출마하여 박준규 후보와 김종기 후보가 당선되었다.

5. 제5공화국 시기

1980년 10월 22일 국민 투표에 의한 헌법 개정에 따라 대통령은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로 선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81년 2월 25일 실시된 제12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정당 전두환 후보가 당선되었다. 역시 각 선거구당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령군은 개정된 선거법에 따라 다시 성주군과 달성군을 합친 경북 제10선거구로 확정되었다. 1981년 3월 25일 실시된 이 선거에서는 모두 6명이 입후보하여 무소속 이용택(李龍澤) 후보와 민주정의당의 김종기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들은 1985년 2월 12일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재선되었다.

6. 제6공화국 시기

1987년 6월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주화의 열기 속에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6·29선언을 함으로써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1987년 10월 27일 국민 투표로 확정된 새 헌법에 따라 12월 16일 16년 만에 국민들의 직접선거로 실시되었다.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 등이 각축을 벌인 결과 노태우 후보가 전국 36.6%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는데 고령군에서는 72.0%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였다.

제6공화국 출범 후 실시된 1988년 4월 26일의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는 한 선거구에서 1인의 의원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로 바뀌었으며 고령군은 달성군과 합쳐 한 선거구로 되었다. 민주정의당 이용택, 통일민주당 배영수(裵泳壽), 신민주공화당 구자춘(具滋春)이 각각 후보로 나섰는데 예상을 뒤엎고 구자춘이 당선되었다. 구자춘은 3당 합당 후 민주자유당 정무 위원이 되었고 제14대 국회의원으로 재선하였다. 고령·달성 선거구는 1992년 3월 24일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때까지 유지되다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에는 고령군과 성주군을 합친 선거구로 개편되었다.

‘문민정부’ 탄생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지닌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1992년 12월 18일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김영삼 후보와 민주당 김대중 후보, 국민당을 창당하여 대권 도전에 나선 정주영(鄭周永) 후보의 3파전으로 압축되었는데 김영삼 후보가 김대중 후보보다 193만여 표가 많은 전국 9,977,332표[총유권자 29,422,658명]를 얻어 당선되었다. 고령군에서는 김영삼 후보가 66.2%라는 높은 지지율을 획득하였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라는 초유의 경제 위기 속에 치러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전국 40.3%의 지지를 얻어 전국 38.7%를 득표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고령군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15.7%의 낮은 지지율을 보인 반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64.5%의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한국당 주진오(朱鎭午) 후보가 당선되었다.

국민의 정부 하에서는 제16대 대통령 선거와 제16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제16대 대통령 선거는 2002년 12월 19일 실시되었으며 한나라당 이회창,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등 7명의 후보가 경쟁하여 전국 48.9%를 득표한 노무현 후보가 전국 46.6%를 득표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고령군에서는 당선자인 노무현 후보가 21.5%의 지지를 얻은 반면 이회창 후보는 71.8%의 지지를 얻어 한나라당에 편향된 정치의식을 보였다. 이런 편향은 2000년 4월 13일 실시된 고령 지역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여서 한나라당 주진오 후보가 투표자 49.3%의 지지를 얻어 재선되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는 2007년 12월 19일 실시되었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 등 12명의 후보가 난립했는데 제16대 대통령 선거 때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은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이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전국 1,1492,389표[득표율 48.7%]를 얻어 당선되었다. 고령군에서는 이명박 후보가 68.0%[13,420표], 이회창 후보가 17.8%[3,518표], 정동영 후보가 7.4%[1,462표]의 지지율을 각각 기록하였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는 2004년 4월 15일 실시되었으며 고령군은 칠곡군, 성주군과 함께 하나의 선거구로 조정되었다. 한나라당 이인기 후보와 열린우리당 조창래 후보가 맞붙었으며 이인기 후보가 전체 60.1%[49,586표]의 득표로 제17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었다. 고령군에서는 이인기 후보가 60.8%9[17,080표], 조창래가 후보 31.6%[6,171표]의 지지율을 각각 기록하였다.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정부가 출범 한 후 같은 해 4월 9일 제18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전국 투표율이 46.1%를 기록하는 등 국민의 투표 참여율이 유례없이 저조했지만 고령군에서는 60.3%라는 비교적 높은 참여율을 기록하였다. 제17대에서와 같이 고령군·성주군·칠곡군을 하나의 선거구로 해서 치러진 이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나선 이인기 후보가 전체 39,375표[49.4%]를 득표해 한나라당의 석호익 후보[37,515표, 47.0%]를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3선 의원이 되었다. 고령군에서는 이인기 후보 8,262표[48.6%]를, 석호익 후보 7,808표[46.0%]를 각각 획득하였다.

[지역민의 정치의식]

고령군은 대구광역시 인근에 위치해 있고, 교통 환경이 양호한 편이어서 다른 시군에 비해 인구의 도시 유출이 높은 편이다. 따라서 고령군은 1963년 11월 26일 실시되었던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때부터 독립 선거구를 갖지 못하고 인근 달성군, 경산군, 성주군, 칠곡군 등과 합쳐진 지역구로 조정되어 선거를 치러왔고 지역 출신 국회의원이 선출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지역 정치에서는 정당의 영향력보다는 문중이나 지연, 학연 등 인맥이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 등 지역주의의 성향이 강하다. 지역민의 선거 참여도는 대개 전국 평균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며 정치적 성향은 보수 정당 또는 보수 정당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비교적 높게 나타난다.

[참고문헌]
  • 『고령군지』 (고령군지편찬위원회, 1996)
  • 중앙선거관리위원회(http://www.nec.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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