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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무계전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358
한자 一次茂溪戰鬪
영어의미역 The First Mugye Battl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호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투
발생(시작)연도/일시 1592년 6월 5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592년 6월 6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 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정인홍|손인갑

[정의]

1592년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에서 손인갑정인홍의 부대가 왜군을 물리친 전투.

[역사적 배경]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왜군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후 동래로부터 좌·중·우의 삼로(三路)로 갈라 한양을 향해 진격하였다. 이때 우로의 왜군은 동래-김해-무계-지례-금산-추풍령-영동-청주-경기도를 따라 진군하였고, 경상북도를 장악한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개령현에 주둔하고 5월 19일에 부장인 무라카미 가게치카[村上景親]로 하여금 무계를 지키게 하였다. 이것은 낙동강 연안 일대를 확보하여 수운을 엄호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5월 29일 정인홍(鄭仁弘)이 고령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거창군사 송암(松菴) 김면(金沔)과 함께 무계를 공격하기로 하였을 때 김면은 병장기가 완비되지 못해 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6월 5~6일 사이의 제1차 무계전투는 전 첨사 손인갑(孫仁甲)김면과 상의하지 않고 정인홍의 병사와 함께 공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경과]

손인갑무계에 머문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6월 5일 밤부터 새벽에 걸쳐 정병(正兵) 50명을 이끌고 잠든 적진을 뚫고 들어가 초병 2명을 베고 대기병실에서 뛰어 나오는 30여 명을 참수하였다. 이때 병사 안에서 일어난 불길이 본진으로 번지자 적병이 당황하여 궁지에 빠짐으로써 1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부장 무라카미는 온몸에 10여 대의 화살을 맞은 채 간신히 도주하였다.

[의의와 평가]

보통 1차 무계전투를 의병장 김면 장군이 손입갑을 선봉장으로 삼아 정인홍의 병사와 합세하여 적을 치게 하였다고 하지만, 『난중잡록(亂中雜錄)』 임진 6월 6일의 기록에 손인갑무계 단독 전투를 힐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손인갑이 주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김면이 거창에서 고령 지역이 위협받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고령으로 돌아온 시점 역시 손인갑의 무계전투 직후인 6월 6일 이후이다.

경상도 지역 왜적이 영산-창녕-현풍-무계-성주를 잇는 낙동강 수운 확보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1차 무계전투는 경상우도 지역의 보전은 물론 경상도를 통해 전라도로 침공하려던 왜군의 작전 계획에 차질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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