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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369
한자 壬辰倭亂
영어음역 Imjinwaeran
영어의미역 Imjin War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호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쟁|전투
발생(시작)연도/일시 1592년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북도 고령군
관련인물/단체 김면|박경록|김응겸|정상례|손호|이천령|최경립|홍걸|박원갑|이춘형|이영준|김봉경|김약|김진|박광선|정이례|정상례|정우|박효선|최여계|정유례|정준례|김성율|김성철|박대임|박정완|박정번

[정의]

1592년 조선을 침략한 왜군에 맞서 고령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부산포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왜군의 주력 부대는 동래-기장-좌수영-울산-경주-영천-의흥-군위-문경의 좌로(左路)와 동래-양산-밀양-청도-경산-대구-안동-선산-상주의 중로(中路), 동래-김해-창원-영산-창녕-현풍-성주-지례-금산-추풍령-영동-청주-경기도의 우로(右路) 등 좌·중·우로로 나누어 한양을 향하였다.

삼로로 나누어 북진한 왜군은 5월 3일 한양을 함락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의 왜군이 한양 함락을 위해 교통로를 따라 빠르게 진격함으로써 왜군의 지나간 지역을 제외한 다른 곳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아 의병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고, 이들이 전후방에서 왜군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한양에 집결한 왜군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가 총대장이 되어 중앙에 주둔하면서 8도를 분담하여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경상도를 분담한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5월 10일에 현풍, 18일에 성주를 침입하였고, 5월 중순에는 3만의 대군으로 대구·선산·개령·상주 등지를 장악하였다. 왜군은 이를 통해 낙동강 수로를 확보함으로써 조령으로 통하는 북방 보급선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경상우도에서 곽재우(郭再祐), 정인홍(鄭仁弘), 김면(金沔)이 의병을 일으켜 각각 의령, 합천 및 초계, 현풍과 고령으로 이어지는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왜적의 영산-창녕-현풍-무계-성주를 잇는 낙동강 수운 확보 계획이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되어 경상우도 지역의 보전은 물론 경상도를 통해 전라도로 침공하려던 왜군의 작전 계획이 무산되었다.

[발단]

경상북도 지방을 장악한 왜장 모리는 개령현에 주둔하고, 5월 19일에 부장인 무라카미 가게치카[村上景親]로 하여금 무계를 지키게 하여 낙동강 연안 일대를 확보하여 수운을 엄호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관군이 붕괴된 상황에서 고령에서 의병장 김면의 부대와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경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면은 창의(倡義)를 결의하고 4월 22일 가동 79명과 종질 15명을 소집하고, 다음 달 5월 11일 마을에서 족친 및 가동, 마을 사람 700여 명을 이끌고 정식으로 기병(起兵)하였다. 고령 지역에서 최초의 전투는 5월 23일 고령현 풍곡리에서 일어났다. 당시에는 박경록·김응겸·정상례·손호·이천령·최경립·홍걸 등이 나서서 왜군을 물리쳤다. 이후 김면은 고령 의병만으로는 불리함을 인식하고 거창으로 이동하여 거창 의병들과 함께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경상북도를 장악한 모리가 개령현에 주둔하고, 5월 19일에 부장인 무라카미로 하여금 무계를 지키게 하여 낙동강 연안 일대를 확보하려고 하자 김면의 부대는 고령으로 돌아와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김면이 이끈 의병의 주요 전투는 1592년 6월 18일경 2차 무계전투, 1592년 6월 9~10일 개산포대첩, 7월 10일 우척현전투, 8월 3일 거창전투가 있다. 이 밖에도 여러 전투가 있었는데, 고령과 거창·성주를 중심으로 거의 하루 내외에 도달할 수 있는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의병의 구성이 가노(家奴)와 향병(鄕兵) 등 지역에 기반을 가진 계층이라는 점, 지역의 지리에 익숙하여 전투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면을 비롯하여 고령 의병은 박원갑, 이춘형, 이영준, 김봉경, 김약, 김진, 박광선, 정이례, 정상례, 정우, 박효선, 최여계, 정유례, 정준례, 김성율, 김성철, 박대임, 박정완, 박정번 등으로 주로 자신이 거주하던 지역을 중심으로 가문 단위로 활약하였다.

1593년 정월 4일 김면은 의병도대장의 교서를 받고, 정월 9일부터 모든 의병진의 순검(巡檢)에 나섰다. 이후 고령 지역의 의병 활동은 김면을 중심으로 체계화되어 경상우도의 의병을 총괄하게 되었다. 1593년 3월 김면이 세상을 떠나자 고령을 위시한 경상우도의 의병들은 곽재우를 중심으로 편제되면서 준(準)관군화되었다. 그렇지만 김면이 의병도대장이 된 시기에는 왜군과 강화 회담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으로써 대규모 전투는 없었다.

[의의와 평가]

김면 부대는 현풍-고령-거창-육십령-전라도, 성주-지례-거창-육십령-전라도, 성주-무주-진안-전주로 침공하려는 왜군과 맞서 싸운 의병 가운데 가장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는 점에서 전공(戰功)이 두드러진다. 이로써 김면은 임진왜란 3대 의병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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