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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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5년부터 757년까지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구역. 신라 진흥왕은 562년(진흥왕 23) 대가야를 멸망시킨 뒤 나라 이름을 그대로 군의 명칭으로 삼아 대가야군으로 편제하고, 예하에 적화촌[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가야면 일원, 고령군 쌍림면 일부]과 가시혜성(加尸兮城)[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개진면 일원]을 두었다. 대가야의 직접 지배 영역이었던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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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 있던 포구. 개경포(開經浦)는 개진면 개포리 앞 낙동강 변의 포구로 옛날에는 소금을 비롯한 곡식을 실어 나를 정도로 번창하였다. 개경포라는 이름은 현재 해인사에 보관된 ‘강화경판 고려대장경’[일명 팔만대장경]을 강화도에서 낙동강을 거쳐 개포나루를 통해 이운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달리 개포나루, 개포진(開浦津), 개산강(開山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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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전후부터 7세기 중엽까지 고령 지역의 역사. 중국의 『삼국지(三國志)』에 기록된 3세기 경상도 지역은 변한·진한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각각 12개의 소국(小國)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보다 많은 소국들이 등장하며, 이들은 주변 소국들과의 경쟁을 통해 성장하였다. 한국 고대 사회는 이러한 소국들이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면서 영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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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년에서 1392년까지 고려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고령 지역 역사. 통일신라시대 고령군은 야로현과 신복현을 영현으로 갖고 있었다. 그러나 후삼국 시기 고령 지역에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뚜렷한 호족이 없는 반면 인근의 성주 지역에서는 이총언(李悤言) 등이 고려 태조 왕건에 귀부하여 후삼국 통일에 기여하였다. 그 결과 성주 지역은 940년(태조 23) 주부군현의 명호 개정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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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남서부에 위치한 군. 고령군은 경상북도 남서쪽 끝에 위치하며 경상남도와 접해 있고, 동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대구시와 맞닿아 있다. 서쪽에 있는 가야산에서 발원한 대가천(大伽川)과 합천군 야로면에서 내려온 안림천의 물길이 주변에 비옥한 평야를 만들며 흘러내려 대가야읍에서 합쳐져 회천이 되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이처럼 고령군은 서쪽의 높은 산과 동쪽의 낙동강으로 보호되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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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고령 지역에 설치된 행정 구역. 고려시대까지 고령군에는 상설 지방관이 파견되어 있지 않았다. 940년(태조 23) 고령 지역에는 두 가지의 행정적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읍격(邑格)이 신라 경덕왕의 개명 이래 고령군으로 여전히 유지되었지만,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경산부의 속군으로 편제되어 위상이 하락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금의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에 읍치를 두고 우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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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해 나간 후기 가야국. 대가야의 기원은 후한 시기 고령 지역에서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서서히 성장해 나간 반로국(半路國)이다. 반로국은 3세기 후반경 내재적인 발전 과정 속에서 현재의 고령군 우곡면 일대인 신복현과 합천 야로 지역인 적화현을 통합하면서 지역 연맹체를 구성하였다. 지역 연맹체 단계에 이르렀을 무렵 대가야의 모습은 대가야읍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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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고령박씨가 정착한 후 도진리는 박씨들의 세거지가 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도진리에는 대가야 시대 유적들이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도진리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도진리 바위구멍 유적’과 인근 사촌리에 있는 ‘사촌리 고인돌’ 등을 통해 최소한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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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년부터 757년까지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구역. 대가야군(大加耶郡)은 대가야(大加耶)가 신라에 멸망한 562년(진흥왕 23)부터 757년(경덕왕 16)에 이르기까지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구역으로 치소는 대가야읍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진흥왕은 562년 대가야를 멸망시킨 후 나라 이름을 그대로 군의 명칭으로 삼았다. 이에 대해서는 대가야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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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지역에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흙이나 돌로 쌓아 만든 방어 시설. 성곽(城郭)이란 내성(內城)과 외곽(外郭)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시가지 전체를 에워싼 나성(羅城)을 ‘곽’이라고 한다면, 그 곽의 안쪽에 또 다른 성벽으로 둘러싸 있는 독립된 공간을 ‘성’이라고 한다. 나라를 뜻하는 국(國)이란 말이 성곽[口]을 창[戈]으로 지키고 있는 형상을 한 데서도 알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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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신리의 내곡천 상류에 있는 연못. 신동못에서 흘러나온 물은 내곡천의 수계에 포함된다. 신동못을 축조한 형식은 필댐[흙댐]이다. 필댐은 토석 재료를 완만한 기울기로 쌓아 올려 만든 본체의 자중(自重)에 의하여 저수(貯水)에 의한 하중을 지탱하는 형식의 댐이다. 기초가 연약한 경우에도 축조가 가능하며, 댐 부근에서 각종 재료를 맞추어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으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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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에 속하는 법정리. 대가야가 망한 뒤 신라 제53대 경덕왕 때 명칭인 신복현(新復縣)에서 ‘신’자를 따서 신동·신리·새마라고 하였다고 하나 고증이 필요하다. 신복현은 본래 신라의 가시혜현(加尸兮縣)으로 경덕왕 때 신복현으로 고쳤다. 조선 말기 고령군 내곡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음동을 병합하여 신동이라 하고 고령면에 편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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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에 위치한 농촌 체험 마을. 신리 녹색농촌체험마을은 옥담·낫골·음지마 3개의 부락으로 형성된 웰빙 농촌 체험 마을이다. 고령 제일의 오지로서 전혀 오염되지 않은 산과 물이 있다. 신동(新洞)이라고도 한다. 옛날 대가야국이 망하고 신라 경덕왕 때에는 신복현(新复縣)이었는데, 그 신복현의 ‘신(新)’ 자를 따서 ‘신리’ ‘신동’ ‘새마’ ‘새마을’이라 부르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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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경상북도 고령군의 역사. 고령이라는 지명은 통일신라시대 757년(경덕왕 16)에 대가야군(大加耶郡)을 고령군(高靈郡)으로 개칭할 때에 처음 등장한다.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 고령현(高靈縣)에 현감이 내려와 다스리기 시작하였고,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를 개정하면서 경상도 고령현을 고령군으로 개칭하였다. 1896년 경상북도 고령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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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강화경판 고려대장경(江華京板 高麗大藏經)’[일명 강화경판]은 13세기 중반 몽고의 침략으로 야기된 민족적 수난기에 피난 수도였던 강화경(江華京)에 설치된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조성되어, 1236년(고종 23)부터 1251년(고종 38)까지 16년간에 걸친 공역으로 이루어졌다. 강화경판이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이운된 시기에 대해서는 고려 말기 설[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