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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006
한자 土器-理解-加耶文化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
집필자 이형기

[개설]

가야 토기는 원삼국시대 와질 토기에서 발전한 것으로, 주로 낙동강 이서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가야 토기는 김해 대성동 29호묘와 양동리 235호묘 출토품으로 볼 때 3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에 처음 출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기원은 그릇 모양이나 자연유, 성형법 등으로 보아 한(漢)의 회유도(灰釉陶)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제작 기술면에서는 이전 시기의 토기들과 차이를 보이나, 점토의 선택이나 제작 면에서 살펴보면 원삼국시대의 와질 토기와는 달리 전업적 생산 체계에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야 토기는 지역에 따라 소지역 양식으로 세분화되어 크게 4세기 대에는 김해 금관가야 양식·함안 아라가야 양식, 5세기 대에는 아라가야 양식·고령 대가야 양식·고성 소가야 양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토기 양식 속에 숨겨져 있는 의미]

토기는 그 자체로 공간성과 시간성 및 계통성을 보여 준다. 이것은 곧 역사성과 결부되어 하나의 양식 또는 문화권을 보여 준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토기 양식은 경제적 측면의 생산·분배 체계와 사회적 관념 체계, 정치적 통제 행위 등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토기 양식의 성립과 변화의 이면에는 정치적 측면만이 아니라 경제 행위로서 생산 기술 체계와 분배 체계의 문제, 매장 의례로 나타나는 관념 체계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들을 보면 토기 양식과 정치체의 관계는 상호 대응되는 관계망을 구축하고 있는데, 토기 양식의 성립은 정치적 측면보다는 기술적·경제적 측면의 생산·분배 체계와 관념 체계가 크게 작용하여 이루어지지만, 토기 양식의 분포와 확산 양식은 정치적 통제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즉, 토기 양식의 확산은 분배와 유통에 대한 정치체의 통제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는 곧 정치체의 사회 발전 단계 수준에 따라 그 영향이 달리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토기 양식의 성립이 정치체의 형성을 보여 주며, 그 분포권은 해당 정치체의 영역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가야 토기 양식의 변동은 해당 가야 정치체의 변화상을 보여 주는 지표가 된다. 가야 토기들은 한정된 지역을 넘어 여러 분지와 수계에 걸쳐 분포하며, 이는 각각 금관가야·아라가야·소가야·대가야라는 정치체의 권역에 대응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토기는 사람과 물자와 함께 이동하기 때문에 지역 간의 물자 교류 양상을 파악할 수 있어, 철 등의 유통권이나 그 루트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 이때의 토기 양식은 정치적·경제적 관계와 그 변화를 반영하고 있어 가야 토기는 문헌 사료로는 살피기 어려운 가야 세력의 시기별 판도와 변화 등의 정치적 동향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따라서 지역적 색채를 띠고 있는 가야 토기를 통해 당시 사회의 관념 체계 등의 문화와 해당 가야 정치체의 변화와 발전 등 정치적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스에키의 원류, 금관가야 양식]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구 교통의 관문인 옛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부산·진영·진해를 포괄하는 지역으로, 가야 전기의 중심 세력이다. 금관가야 양식을 대표하는 특징적인 기종으로는 화로형그릇받침[爐形器台]과 외절구연고배[外切口縁高杯]를 들 수 있는데, 일본의 하지키[土師器]를 모방한 연질 토기 역시 이 지역에서 주로 확인되는 기종이다.

외절구연고배는 배신(杯身)의 상부에서 한 번 꺾여 구연이 외반 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 특징이며, 받침은 짧은 것에서 긴 것으로 변화하며, 투창이 없는 것에서 뚫리는 것으로 변한다. 화로형그릇받침은 전시대의 와질 토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동체부에 손잡이가 달린 것이 특징이다. 손잡이 단면은 원형에서 장방형으로 바뀌고, 다시 세장 방형으로 변화하고 있다.

금관가야 양식 토기는 4세기 후반 신라가 낙동강 하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쇠퇴하기 시작하여 5세기 이후에는 신라 양식으로 변화하지만, 4세기 후반 일본열도로 전래되어 스에키[須恵器]의 원류가 된다. 즉, 금관가야 토기를 만들던 집단이 신라의 팽창으로 전기 가야 연맹이 붕괴됨에 따라 일본으로 대거 건너가게 되고, 이들이 가진 토기 기술이 전파되어 스에키가 생산되게 된 것이다.

[후기 남부 가야의 맹주 아라가야 토기 양식]

아라가야는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하여 남강 및 낙동강을 통해 가야 전 지역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인 함안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정치체였다. 아라가야의 특징적인 토기로는 4세기 대의 공(工)자형고배, 노형기대(爐形器臺), 양이부승석문타날호(兩耳附繩蓆文打捺壺)와 5세기 대의 화염형투창고배와 고배형기대(高杯形器臺) 등이 있다. 4세기 대 아라가야 양식의 통형 또는 공자형고배, 노형기대, 양이부승석문타날호는 남강수계, 황강수계, 낙동강 상·중류 지역의 교통로를 따라 가야 토기 가운데 가장 넓은 분포권을 형성하였다.

공자형고배는 이전 시기의 목제두(木製豆)를 모방하여 제작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끝부분에서 넓게 벌어지며 배신은 매우 얕다. 대각에는 무늬가 없는 것도 있으나 삼각형이나 직사각형, 쐐기형으로 문양을 찍거나 투공을 뚫어 장식한다.

화염형투창고배는 대각에 화염형 투창이 뚫려 있는 것으로 고배의 크기가 대형에서 소형으로, 화염부가 횡타원형의 불꽃길이가 짧은 것에서 원형의 불꽃길이가 길어지는 형태로 변화한다. 노형기대는 배신에 비해 대각이 길고 나팔 모양으로 넓게 벌어지며 신부가 얕은 것이 특징이다. 대각에는 삼각형이나 장방형의 투공을 뚫고 시문하기도 하였다.

고배형기대는 대각이 넓고 완만하게 벌어지는 것에서 점차 대각 상부가 축약되고 벌어지는 폭도 좁아들어 대각이 원통과 비슷하게 변환한다. 또한 다른 지역과는 달리 늦은 시기까지 배신이 깊은 형태를 유지한다. 통형기대(筒形器臺)는 대각이 엎어 놓은 바리 모양으로, 수발부는 깊은 접시 모양을 하고 있으며, 다른 지역의 기대에 비해 돌대가 강하게 돌출하고 몸통 부분에 사격자문이나 삼각 거치문을 시문하기도 하였다. 다른 가야 토기와 달리 아라가야 토기는 가야읍 장명마을에서 토기 요지가 발견되어 그 제작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소가야 토기 양식]

해상 교통의 요지인 고성반도를 중심으로 남해에 면한 사천 지역과 산청, 진주를 비롯한 남강 중류 지역을 포괄하는 것이 소가야 토기이다. 삼각투창고배와 대각 하단에 돌대가 돌려진 일단장방형투창고배(一段長方形透窓高杯)는 소가야 양식 고배의 특징적인 형태이며, 수평구연호가 대표적인 기종이며, 광구장경호는 특징적인 기종이다. 삼각투창고배는 시간이 지나면서 뚜껑받이 턱의 돌출도가 약해지고 투창수가 줄어들며 소성도가 약해진다. 일단장방형투창고배는 대각 하단에 돌려진 돌대의 돌출토가 약한 것에서 강한 것으로 변화한다.

수평구연호(水平口緣壺)는 구연부(口緣部) 형태가 일정한 면을 가지고 수평을 이루는 특징을 갖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크기가 작아지며, 구연부가 외경하는 형태에서 수평화 또는 외절하는 형태로, 경부가 곡선에서 직선으로, 저부가 원저에서 평저로 변화한다. 광구장경호는 경부의 외반도가 심해지고 동체에 비해 커지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대부직구호(臺附直口壺)는 아라가야 양식과 소가야 양식에 존재하는 기종으로 공통적으로 구연부와 대각이 축소되는 변화를 보이지만, 아라가야 양식은 상하 일렬 투창, 소가야 양식은 상하 교차 투창이란 차이를 보인다.

고배형기대는 배신과 대각의 접합 부위가 좁은 것이 특징이며, 초기에는 배신이 깊고 높고 완만하게 외반 하는 대각을 가졌으나, 점차 배신이 직선으로 외반 하고 구연이 수평으로 꺾이며, 대각 지름이 좁은 특징적인 형태로 변화한다.

통형기대는 직선으로 벌어지는 대각과 오목한 접시 모양의 수발부가 특징이다. 외형적으로는 신라의 기대와도 비슷한 점이 있으나 투창과 수발부 모양에서 차이가 난다. 수발부에 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 투창 모양이 삼각형인 것과 장방형인 것에 따라 세분된다. 대체적으로 몸통과 대각의 구분이 명확한 것에서 그렇지 못한 것으로 퇴화한다.

[대가야 양식 토기]

대가야 양식 토기는 대가야의 중심 고분군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 출토 토기 기종 중에서 고령의 지역적 특색을 가장 잘 반영하면서, 다른 지역의 동일 기종 토기에는 보이지 않는 고유한 특성을 가진 토기를 말한다. 고령 지역에서 만들어져 다른 지역으로 확산된 토기를 고령 양식 토기로 불러야 하지만, 대가야의 성장과 더불어 정치적 지배 영역을 확산하는 지표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대가야식 토기로 지칭할 수 있다.

대가야식 토기는 4세기 대에 바리모양그릇받침[鉢形器臺], 목긴항아리[長頸壺], 굽다리접시[高杯] 등의 모양이 완성되면서 고령적인 지역색으로 성립되기 시작했으며, 5세기 초가 되면 고령 지산동 고분군 축조와 함께 양식적인 완성을 이루게 된다. 이 무렵 서쪽의 내륙을 통한 대가야의 확장과 함께 대가야는 거창, 함양, 남원까지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대가야식 토기를 전파하였다. 6세기 들어 대가야식 토기는 경상남도 진주를 거쳐 고성(固城)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뚜껑있는목긴항아리[有蓋長頚壷]는 대가야식 토기 중에서도 가장 고령적인 특징이 강한 토기다. 둥근 공 모양의 몸체에 가운데를 조른 듯이 중간 부분이 부드럽게 잘록한 형태를 한 긴 목 부분을 가지고 있다. 긴 목 부분은 돌대로 대개 3등분되고, 그 안에 밀집파상문(密集波狀文)이 새겨져 있다. 목 부분과 몸체의 연결도 S자형으로 부드럽게 이어져 전체적으로 곡선미와 함께 풍만한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입술부분은 안으로 굽어 뚜껑받이 턱이 되고, 그 위에 단추형 꼭지를 가진 뚜껑으로 덮여 있다.

바리모양그릇받침[鉢形器臺]은 뚜껑 있는 목긴항아리와 세트를 이루는 대가야식 토기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그릇을 올려놓는 받침부가 깊숙하고 위로 넓게 벌어진다. 표면에는 밀집파상문과 침선문(針線文)이 새겨져 있으며, 팔(八)자형으로 벌어진 다리 부분은 3~4단의 돌대로 구분되며, 3각형 투창이 상·하단 일치하게 뚫려 있다.

원통모양그릇받침[筒形器臺]은 중형 봉토분 이상에서만 출토되어 양은 많지 않으나 대가야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토기다. 바리모양그릇받침을 엎어 놓은 듯이 넓게 펴진 다리 부분 위에 아래 위가 비슷한 원통형의 몸체를 세우고 그 위를 볼록하게 솟아오르게 만든 다음 그릇 받치는 부분을 납작하며 넓게 벌어지는 형태로 만들었다. 몸통과 받침 부분에 삼각형 혹은 직사각형의 투창을 촘촘히 뚫고 투창 사이에는 밀집파상문과 침엽문(針葉文)을 새겨 놓았다. 특히 몸통 부분 어깨에서 다리 부분 위까지 뱀 모양을 형상화한 세로띠를 네 군데 대칭되게 붙여 전체적으로 매우 화려하고 신비한 느낌을 준다.

무개고배(無蓋高杯)는 배신이 얕고 받침은 팔자형으로 벌어지나 대각의 최소지금이 배신 접합부보다 약간 아래에 있어 가운데가 약간 졸린 듯한 느낌을 주면서 유연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유개고배는 대가야 양식 토기의 대표 기종 중 하나로 배신이 전체적으로 납작한 형태이고, 대각은 무개고배나 바리모양그릇받침의 그것과 같이 팔자형으로 벌어지나 가운데가 졸린 듯하며 균형 있게 내려온다. 대각에는 방형이나 장방형 투창이 상·하단 일치되게 뚫려 있어 범가야적인 양식을 보여 준다. 시간이 갈수록 전체적으로 납작해지며, 뚜껑은 배신과 같이 납작한 느낌을 주고, 중앙에는 가운데가 약간 튀어나온 볼록 단추형이나 납작 단추형의 꼭지가 붙어 있는데, 이를 중심으로 방사상 점열문대가 2~3줄 돌려져 있다.

개배는 약간 불룩하면서도 납작한 두 개의 토기를 아래위로 마주 덮은 것 같은 형태의 토기로 그 형태가 독특한 편인데, 고령 양식 토기 분포 지역에서 흔히 부장되어 있다. 형태가 단순한 대신 적갈색 연질 개배와 회청색 혹은 회색의 경질 두 가지 종류로 제작된다. 처음 만들어질 때는 뚜껑에 점열문이 새겨진 단추형 꼭지의 뚜껑이 사용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양이 없어지고 꼭지도 유두형 꼭지로 바뀌고 개신도 점차 평평해져 수평적으로 변화한다.

[토기로 보는 가야 사회 변천사]

4세기 대 뚜렷한 토기의 양식적 특징과 분포권을 형성한 정치체가 금관가야와 아라가야라는 사실은 가야 전기의 중심국이 두 나라임을 보여 준다. 그 가운데 아라가야 양식 토기의 분포권으로 보이는 광역 관계망은 아라가야가 금관가야와 함께 가야 전기에 양대 세력을 이루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종래 고고 자료에 의존한 일방적인 금관가야 우위론에 배치되는 것으로서, 문헌 사료에 보이는 아라가야 세력의 실체를 증명해 준다. 한편,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가 되면 금관가야와 아라가야 양식의 토기가 소멸되고 그 분포권이 축소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금관가야의 몰락과 아라가야의 일시적인 쇠퇴를 반영한 것이다.

이후 소가야 양식 토기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이전 시기의 아라가야 양식 토기를 교체하듯 남해안과 황강 유역, 남강 중·상류 지역까지 분포권이 확대된다. 이는 아라가야를 대신하여 남강 수계와 남해안 일대에서 소가야가 짧은 기간이지만 부각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4세기 이래 독자적인 토기 양식이 미미했던 대가야 양식 토기는 5세기 중엽 이래 황강 유역의 합천·거창과 남강 중·상류 지역의 함양·남원과 섬진강 수계의 남원분지와 구례 일대 및 일본에까지 분포하게 된다. 이는 아라가야와 소가야가 활동했던 지역을 고령 세력이 장악함으로써 4세기까지 내륙의 소국에 불과했던 대가야가 가야 후기의 중심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다만 562년경 가야의 멸망을 전후해 신라 후기 양식 토기가 급격하게 이 지역에 출현하여 신라가 가야 지역을 영역화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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