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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442
영어음역 Goindol
영어의미역 Dolmen
이칭/별칭 지석묘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류영철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청동기시대의 묘제 중 하나.

[개설]

고인돌은 거대한 돌을 이용해 만든 선사시대 거석 건조물의 일종이다. 고인돌이라는 명칭은 작은 돌이 큰 돌을 괴고 있다는 뜻의 괸돌에서 유래하였다. 일본에서는 주로 지석묘(支石墓)라고 부르고, 중국에서는 석붕(石棚)·대석개묘(大石蓋墓), 유럽에서는 대체로 거석기념물 또는 돌멘이라고 부른다. 세계적으로 선돌[立石]과 함께 거석 건조물로 알려져 있다. 고인돌은 유럽, 북아메리카, 지중해 연안, 아시아 등 거의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 우리나라가 약 30,000여 기로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특히 전라남도 지방에 20,000여 기가 집중 분포하고 있다.

고인돌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대부분의 고인돌은 강이나 바닷가 옆의 평지,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나 드물게 산기슭이나 산마루에 분포하는 경우도 있다. 기능에 따라서는 제단으로 사용한 고인돌과 공동 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墓標石)으로 사용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이 무덤으로 쓰이고 있다.

고인돌의 형식은 과거에는 북방식과 남방식 등으로 구분했지만, 현재는 탁자식·기반식·개석식 등으로 나눈다. 탁자식은 마치 책상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며 무덤방이 지상에 위치한다. 기반식은 무덤방을 지하에 만들고 그 주위에 고임돌을 놓은 후 그 위에 돌을 덮어 마치 바둑판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개석식은 고임돌이 없는 기반식으로 무지석식이라고도 한다.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석검과 석촉을 비롯하여 토기류, 홈자귀, 지석, 갈돌, 방추차, 어망추 등이 주를 이룬다. 더하여 비파형 동검과 청동기, 옥류, 붉은간토기 등의 부장품도 출토된다.

고인돌의 축조 연대는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으나, 대체로 B.C. 15세기에서 초기철기시대 이전까지로 볼 수 있다. 고인돌 축조와 관련된 사회적 성격에 대해서는 고인돌 축조를 위해서 많은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정 정도의 계급성을 띤 집단의 상정이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분포 및 특징]

고령 지역에서는 대체로 대가천안림천 유역, 그리고 회천낙동강으로 유입되는 소 지류 변에 각 18개소에 30여 기의 고인돌[선돌 1기 포함]이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과거 경지 정리 전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고인돌이 분포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계별로 구분해 볼 때 우선 대가천 유역은 운수면 봉평리 순평마을·봉평리·운산리의 고인돌을 들 수 있으며, 대가야읍내상리·저전리·본관리의 고인돌은 그 지류로서 함께 묶어 볼 수 있다. 안림천 유역의 고인돌은 쌍림면 산주리에서 시작하여 하거리·매촌리·월막리로 이어지면서 계속 분포하고 있다. 또 회천 변에 형성된 충적지에 분포하는 것으로는 개진면 양전리·직리·개포리의 고인돌과 우곡면 사촌리의 고인돌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낙동강으로 바로 유입되는 소지류변인 성산면 어곡리에도 다수의 고인돌이 분포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고령 지역의 고인돌은 크게 볼 때 가야산의 동북쪽에서 발원하는 대가천 유역에는 운수면 일대의 평야 지대에 집중되어 있고, 가야산의 남서쪽에서 발원하는 안림천 유역에는 쌍림면 산주리·하거리·매촌리 일대의 평야 지대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두 지역 모두 하천 변에 퇴적된 충적토상에 입지하고 있으나 이들 두 하천이 합류한 회천 유역인 개진면 양전리·직리의 고인돌과 우곡면 사촌리의 고인돌을 비롯하여 소지류 유역인 쌍림면 월막리의 고인돌 및 대가야읍 내상리·저전리·본관리의 고인돌, 그리고 개진면 개포리성산면 어곡리의 고인돌은 대체로 사면 기원 퇴적층의 말단부에 분포하고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이와 같은 입지상의 차이점이 고인돌을 조성한 시기를 반영하는 것인지 또는 내부의 구조적인 차이점이 있는지에 대해서 현재로서는 발굴된 자료가 거의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하천 변에 입지한 운수면 봉평리의 고인돌과 구릉 사면에 입지한 성산면 어곡리의 고인돌을 부분적으로 발굴 조사한 결과를 비교해 볼 때, 봉평리의 경우 석관에 바닥석을 깔았지만 어곡리의 경우 바닥석이 없는 소형의 석관과 석곽이 혼재하고 있으며, 주변에 부석(敷石) 시설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일정한 차이점을 보인다. 두 유적의 시기는 어곡리의 경우 부장된 유물이 없어 직접 비교하기는 어려우나 주변에서 출토되는 구순각목토기편 등을 참고할 때 봉평리와 마찬가지로 청동기시대 중기 이전으로 편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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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령 지역에 있는 고인돌 상석(上石)의 규모는 길이 120~180㎝ 정도의 비교적 작은 것도 있지만 대체로 200~270㎝ 정도가 가장 많은 편이다. 그리고 너비는 90~180㎝, 높이 50~130㎝ 정도가 일반적이다. 따라서 대형 고인돌은 확인되지 않으며, 현재 가장 규모가 큰 것은 길이 420㎝가 넘는 대가야읍 저전리 고인돌쌍림면 산주리 고인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굄돌[支石]이 드러나 보이는 경우도 간혹 있으나 대부분은 굄돌이 보이지 않거나 처음부터 없었던 이른바 개석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앞서 운수면 봉평리 고인돌의 경우에도 상석의 이동을 상정할 수 있지만 아무튼 지석은 확인되지 않았다.

고령 지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인돌에는 흔히 상석 윗면에 크고 작은 바위구멍[性穴]이 패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대가야읍 내상리저전리운수면 봉평리 고인돌, 성산면 어곡리 고인돌 등의 상석에는 7~20여 개의 구멍들이 패여 있고, 특히 어곡리 고인돌의 경우 직경 21㎝, 깊이 14㎝ 정도의 큰 구멍들도 있다.

고령 지역의 고인돌을 편년하기에는 아직 발굴된 자료가 많지 않아 불가능한 상태이나 대체로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중기에 이르는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과거 고령 지역에도 많은 고인돌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으나 1970년대를 전후로 진행된 농경지 정리 사업과 기계화 영농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대부분 자취를 감추고 현재는 일부만이 남아 있다.

한편, 고인돌과 더불어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거석 문화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선돌은 주로 평야나 계곡의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고인돌 부근에 있는 경우도 있다. 운수면 봉평리 순평마을과 신간리 선돌은 가까운 곳에 있는 봉평리 순평마을과 봉평리·운산리의 고인돌과 함께 운수 지역의 청동기시대 문화상을 보여 주는 좋은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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