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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곡리산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1566
한자 內谷里山城
영어음역 Naegok-risanseong
영어의미역 Naegokrisanseong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내곡리 산 141-1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
집필자 정동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산성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가야시대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내곡리 산 141-1 지도보기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내곡리에 있는 가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

[개설]

내곡리산성 안에서는 시대를 알 수 있는 토기 등의 유물이 별도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근에 위치한 야정리 유물산포지와 구릉 상으로 연결되고 있다. 야정리 유물산포지는 대가야시대의 짧은목항아리, 긴목항아리 등의 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이다.

[위치]

내곡리산성대가야읍 내곡리우곡면 속리, 사촌리 등이 서로 접한 할매성지산의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다. 지번 상으로는 대가야읍 내곡리 산141-1번지에 해당한다. 하지만 내곡리산성우곡면 속리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가장 가깝다. 즉 우곡면소재지인 도진리에서 도진교를 건너 야정리를 거쳐 속리의 윗마을 뒷산으로 오르는 것이 제일 쉽다. 우곡면 사전리에서 대가야읍 내곡리 쪽으로 뻗어 내린 산지가 회천에 의해 막히는 끝부분에 할매성지산이 있고, 내곡리산성은 그 정상부에 위치한다. 내곡리산성이 위치한 할매성지산의 북쪽과 동쪽으로는 대가야읍에서 흘러내린 회천이 휘감아 내려간다.

[현황]

내곡리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은 ‘할매성지산’, 즉 노고산(老姑山)인데, 이러한 산명(山名)은 전국적으로 산성이 입지한 곳의 보편적인 지명이기도 하다. 성벽은 해발 225m 정도 되는 산정 부근의 등고선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다. 산정을 둘러싼 테뫼식의 토석 혼축성(土石混築城)으로 보이며, 형태는 땅콩 모양과 비슷하다. 전체적으로 북쪽이 넓고 남쪽은 약간 좁으며, 지형은 남쪽이 더 높다.

내곡리산성의 둘레 길이는 500m 정도이며, 성 내부는 비교적 평탄한 편이다. 서쪽은 급격하게 경사진 지세를 활용한 것으로 보이며, 동쪽은 비교적 완만하게 경사져 있다. 주위로는 성벽을 쌓을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치석 흔적이 있는 할석이 흩어져 있으나, 성벽이 잘 남아 있지는 않다. 내곡리산성 안 정상부에는 지름 15m 정도, 높이 1m 정도의 돌무지가 있는데 주로 인공적으로 깐 할석들이며, 용도나 기능은 자세히 알 수 없다. 혹시 봉수대의 역할을 한 것이거나, 망대의 흔적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곡리산성의 절개된 면을 보면 인공적인 토축(土築)의 흔적이 드러나 보이기도 한다. 속리에서 산성으로 오르다 보면 내곡리산성에 조금 못 미친 능선 사면에 집수정, 혹은 우물로 보이는 구덩이가 확인된다. 이 산성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남동쪽으로 회천이 한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 대가야읍 방향과 개진면 지역이 한눈에 조망된다.

내곡리산성은 동편으로는 우곡면 도진리에 위치한 도진리산성과 대응하고 있다. 따라서 도진리산성과 함께 회천을 통해 대가야읍으로 진입하는 통로를 방어하기 위한 산성으로 기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산성의 정확한 축조 시기는 현재로서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곡리산성과 능선 상 연결되는 남동쪽에 대가야시대의 토기가 출토되는 야정리 유물산포지가 위치하고 있어, 이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따라서 내곡리산성은 대가야시대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의의와 평가]

우곡면 지역은 대가야시대의 가시혜현(加尸兮縣)이 위치한 곳으로, 도진리산성은 가시혜성(加尸兮城), 혹은 가혜성(加兮城)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할매성지산에 위치한 내곡리산성은 바로 도진리산성과 대응하여 축조된 산성이다. 내곡리산성낙동강회천 방면으로 진군하는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던 방어성으로 여겨진다. 현재 대가야의 왕도를 방어하기 위한 도성 방어 체계의 구체적인 모습은 잘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조사된 산성을 토대로 생각해 볼 때, 내곡리산성도진리산성과 함께 낙동강회천 방면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오는 회천 방어선을 담당했던 산성으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인터뷰(대가야박물관 학예연구실 연구원, 200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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