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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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輿 |
영어음역 | Gwak Ye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이병희 |
성별 | 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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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 1058년 |
몰년 | 1130년 |
본관 | 청주(淸州) |
자 | 몽득(夢得) |
호 | 동산처사(東山處士) |
아버지 | 곽상(郭尙) |
시호 | 진정(眞靜) |
[정의]
고려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몽득(夢得)으로 곽상(郭尙)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어려서 꿈에 어떤 사람이 여(輿)라고 명명하였으므로 이름을 삼고 몽득으로 자를 삼았다. 어려서부터 맵고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았으며, 여러 아이들과 함께 놀기를 싫어하고 항상 홀로 한방에 거쳐하여 학문에 힘썼다.
문과에 급제하여 내시부(內侍府)에 속했다가 합문지후(閤門祗侯)를 거쳐 홍주사(洪州使)로 나아가 홍주를 다스렸다. 홍주목사로 있을 때 성 바깥 시냇가에 작은 암자를 짓고 장계초당(長溪草堂)이란 이름을 붙이고 공무의 여가만 있으면 매양 그곳에 가서 휴식하였다. 임기가 차서 돌아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이 되었다가 사직하고 김해(金海)의 초당(草堂)에 은거하였다.
1105년 예종이 즉위하자 세자일 때 사귄 정으로 불러서 궁중 순복전(純福殿)에 있으면서 왕의 스승으로 담론(談論)에 응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그를 금문(金門, 대궐문)의 우객(羽客, 신선)이라고 하였다. 1115년 왕이 미복으로 곽여(郭輿)[1058~1130]가 있는 순복전에 가서 주연을 배설하고 근신들과 함께 글을 강론하다가 새벽이 되어서 헤어진 일이 있다.
1116년 종친과 곽여를 불러 주연을 베풀고 왕이 시 세편을 짓고 곽여에게 화답시를 지어 올리게 한 일도 있다. 왕이 그가 오래 궁중에 있음에 혹 나가 놀기를 생각할까 하여 서화문(西華門) 밖에 별장(別莊)을 주었다. 송나라로 사신가는 왕자지(王字之)와 문공유(文公裕)를 위하여 자기 별장에서 전송하는 연회를 차리고자 왕에게 청하였더니 왕이 주과(酒果)를 내렸는데, 정도에 지나치게 성대하여 당시의 여론이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 뒤 그가 궁중에서 물러가서 은거할 것을 요구하자 왕이 성동(城東) 약두산(若頭山)에 집을 짓고 살게 하였다. 그는 호를 동산처사(東山處士)라 하고 거처하는 방을 허정당(虛靜堂), 서재를 양지재(養志齋)라 이름지었다. 왕이 친히 편액을 써서 하사하였다.
예종 때 하루는 왕이 산재(山齋)에 미행(微行)하였더니 곽여가 마침 서울에 올라가 없자 오래 산중에서 배회하다가 벽상(壁上)에 시부(詩賦)하고 돌아온 일도 있다. 또 뒤에 산재에 행행(行幸)하였다가 만나자 손을 잡고 반가워 외쳤다고 하니 예종이 대단히 대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종신토록 결혼하지 않았으며 산재에서는 다만 비첩(婢妾)만 데리고 있었다. 그는 몸이 부대하고 수염이 없었으며 눈은 구슬 같았다.
[상훈과 추모]
1130년(인종 8) 졸하였는데 향년이 72세였다. 왕이 슬퍼하여 근신을 보내어 제(祭)를 지내고 진정(眞靜)이라 증시(贈諡)하였다. 지제고(知制誥) 정지상(鄭知常)에게 명하여 산재기(山齋記)를 짓게 하고 비석을 세웠다. 상당구 명암동 약수터의 청원사에 제향되고 근년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학문과 사상]
서사(書史)를 섭렵하여 도(道) 석(釋) 의약(醫藥) 음양(陰陽)의 설까지 보면 곧 외워 잊지 않았으며, 사(射) 어(御) 금(琴) 기(碁)도 못하는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