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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청주지역의 육영 사업가. 학교법인 서원학원(西原學園)을 설립하여 운영한 육영 사업가이다. 본관은 신천(信川)이며, 호는 운호(雲湖)이다. 아버지는 강병열(康秉烈),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부인은 임관익(任寬益) 여사이며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1917년 평안남도 용강군 서화면 용상리에서 강병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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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에서 활동한 산악인. 주성초등학교와 청주중학교, 청주상업고등학교(현 청주대성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전매청 청주연초제조창에 근무하면서 청주대학교 경영학과(야간) 2년을 수료하였다. 1970년 3월 대한산악연맹 회원이 되어 활동하다가 한국일보사와 대한산악연맹이 공동으로 후원한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대장 김영도, 대원 19명)의 제주도 대표로 참가하였으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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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정치인. 1912년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에서 태어났다. 청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45년, 33세로 괴산군수로 부임하여 뛰어난 행정력을 발휘해 군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 이듬해 청원군수로 부임하여 많은 사업을 추진하였다. 특히, 농민들의 편에서 업무를 추진하여 뛰어난 군수로서 이름을 얻었다. 제2대 국회의원에 1950년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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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단원으로 의열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일찍이 상경하여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귀향하여 청주 청남학교(靑南學校) 교사로 재직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에 헌신하였고, 해외로 망명하였다가 광복 후 귀국, 사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1909년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의 당원이 되어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지하공작을 전개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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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8세에 동학교도가 되고,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 손병희(孫秉熙)[1861~1922]와 함께 6만 여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하여 진압당한 후 전국 각처를 방랑하였다. 1908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전제관장(典制觀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만세운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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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 출신으로 초창기 한국근대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평론가 겸 소설가. 한국 낭만주의 문학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최초의 근대 연극단체라 할 수 있는 ‘토월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23년 『개벽』에 처음으로 프로 문학 이론을 소개하였다. 이후 ‘카프(KAPF)’ 발기인으로 프로 문학 운동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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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부인은 여류화가 박래현이다. 1913년 2월 28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7세에 장티프스로 청각을 잃고, 부모의 도움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2001년 1월 23일 충청북도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 ‘운보의집’에서 향년 86세에 숙환으로 죽었다. 승동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당화숙(以堂畵塾)에서 김은호(金殷鎬)에게 그림을 배워 6개월만에 「판상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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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군 출신의 근대조각가. 호는 정관(井觀)이며, 아버지는 김홍규, 어머니는 김현수이다. 소설가 김기진의 형이며, 아내는 허하백이다. 배재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토월회(土月會)에서 활동하고, 토월미술연구회, 기독청년회, 경성여자상업학교 등의 강사로도 있었다. 1925년 카프(KAPF)의 발기인으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에 가담했다가 6년간의 옥고를 치르는 불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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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지역에서 활동했던 연극인. 1957년 문총내 연극분과 발기인 5명(이정실, 김성렬, 김근수, 이상훈, 송주헌) 중 한명으로 대한적십자사충북지사 사무국장으로 재임하며 김근수 등 뜻있는 연극인들과 결속하여 충북연극협회 창립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1959년 한국연극협회로부터 승인을 받아 초대지부장을 역임했다. 매년 충북예술제 행사에 때맞춰 연 1회 연극공연을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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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민족혁명당 당원으로 상해와 남경 등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930년부터 중국 상해·남경 등지를 다니면서 신익희(申翼熙)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민족혁명당의 당원으로 가입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민족혁명당은 1932년 1월 일본이 상해 침략을 시작으로 중국 본토 침략을 본격화하자 급변하는 객관적 정세에 비추어 독립운동 세력의 총집결을 절감하고 통합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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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청주지역의 육영사업가. 자수성가하여 학교법인 청석학원을 설립한 교육사업가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호는 청암(淸巖)이다. 아버지는 김한중(金漢重)이고, 어머니는 여양진씨(驪陽陳氏)이다. 동생으로는 함께 교육사업에 전념한 석정(錫定) 김영근(金永根)이 있다. 아들로는 청주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준철(金俊喆) 박사가 있는데 생부(生父)는 석정 김영근이다. 경상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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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 출신의 교육자이자 독지가. 김유복례(김유례)는 1910년에 태어나 16세에 결혼해 청상이 된 후 3남매 마저 모두 잃고 평생을 혼자 살았다. 청주에서는 욕쟁이 할머니로 유명하며, 평생 모은 재산을 충북대학교에 기탁했다. 김유복례는 1997년 작고하였다. 김유복례의 재산 기탁 이후 김유례 장학재단이 설립되었으며 충청북도 청주시 지역의 건전한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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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가로서 시인으로서 교육자로서 청주지역사회에 기여했던 예술가. 테너 김일회는 청주세광고를 거쳐, 청주사범대학에 입학, 현악기인 콘트라베이스를 전공하다 대학3학년 말에 성악으로 전공을 바꾸어 졸업하였다. 이후 충청남도 홍성에서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34살의 나이로 이탈리아로 유학하여 5년간 공부와 연주활동을 하고 1995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독창회, 오페라, 듀오콘서트 등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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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8일의 상주군 화북면 문장산(文藏山)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화북면 장암동(壯岩洞) 구장인 이성범(李聖範)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의하고, 4월 4일 인근 지역에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는 권고문을 보내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거사일인 4월 8일 오후 2시경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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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때 청주와 인근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만세시위를 일으키게 한 독립운동가. 『매일신보(每日申報)』 판매업을 하고 있던 그는 1919년 3월 1일 광무황제의 국장(國葬)에 참례키 위해 상경했을 때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는 것을 보고, 귀향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귀가 후 강내면(江內面)에서 매일 산 위에서 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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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단식, 순절한 애국지사. 청주 지방의 유생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을 펼치는 한편, 평소 배일의식이 강하여 일제의 호적 기입을 거부하고, 이른바 ‘경절’에 일장기를 달지 않았으며 납세와 부역 등을 거부하는 등 항일투쟁을 하였다. 그러던 1913년 2월 일본 헌병에 피체되었으나 단식투쟁으로 동년 3월에 풀려났다. 그러나 곧 이어 5월 청원군 오창면(梧倉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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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외천리에서 김성균(金成均)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일본 주오(中央)대학 재학 중 1944년 학도병으로 입대, 소위로 임관되었으나 일본의 패망으로 귀국하였다. 국방경비대에 1946년 입대, 1947년 제1연대장이 되었고, 한국동란 때는 제6사단장으로 참전하였다. 그 후 육군사관학교 교장, 국방부 합동참모본부총장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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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의 향토기업인 한국도자기의 창업주. 호는 청운(靑雲), 본관은 김해(金海)로 청원군 오창면 가곡리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오창보통학교를 마쳤다. 신앙심이 깊어 1959년 중앙신학교에 입학, 사회사업학과를 졸업하였다. 해방 전 대동목재를 설립, 일찍부터 사업의 길에 투신하고 삼광사, 충북제도 등 기업을 경영했다. 1959년, 충북제도인수 대표이사로 취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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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시에서 활동한 교육자.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에서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김천호는 제11대, 12대 충청북도 교육감을 역임한 교육자로 교육을 위해 헌신하다 2005년 6월 20일 새벽 충청북도 청주시 봉명동 교육감 관사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6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김천호는 1962년 4월부터 1978년 7월까지 주성초등학교,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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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방의 항일투쟁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일찍이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4년에 청주에 청남학교(淸南學校)를 설립하고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안희제(安熙濟)·김동삼(金東三)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후 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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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청원군 북이면 면사무소 서기로 재직하던 중 1919년 3월 1일이래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지는 것에 자극을 받아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하였다. 1919년 4월 1일 밤 8시경,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북이면 신기리 주민을 규합하여 근처 신대리 앞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에 다수의 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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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일원에서 항일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 일찍이 고향인 충청북도 청원에서 3·1운동에 참가한 뒤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6년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신민부(新民府)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벌이다가 1928년 2월 21일 중동선(中東線)이 통과하는 해림시(海林市)에서 남한송(南韓松)·서광수(徐光洙) 등의 동지들과 함께 모종의 중대 사명을 수행하던 중 일본과 중국 혼성 경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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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유학자.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자는 명보(明甫)이며, 호는 금사(錦史)이다.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신송리 출생으로 체화당(棣華堂)의 사촌동생인 서암(西庵) 노덕원(盧德元)의 12대 손이다. 어려서부터 어질고 총명하여 소년기에는 매은(梅隱) 오영호(吳榮鎬)와 소강(小康) 이인상(李寅尙), 남계(楠溪) 신창모(申昌模)의 문하에서 경학을 공부하고 스승의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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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09년경 동지들과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남대문 밖에 소의학교(昭義學校)를 세워 민족교육사업에 나섰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이른바 한성정부(漢城政府)의 성립과 국민대회(國民大會) 개최를 추진하였고, 자금 조달을 추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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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정치가. 1921년 5월 청원군 북일면 입동리에서 태어났다. 청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건국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조국에서의 독립투사들의 독립운동을 보았고, 조국과 겨레의 비통을 느꼈다. 일제가 강제 징집을 하였던 1945년 1월 1일 학도병으로 출정하여, 3월에 육군소위로 임관되었다. 8·15 해방과 더불어 건군(建軍)을 미리부터 염려하고 동지를 모아 선각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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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출신의 문학인. 1928년 9월 20일 아버지 민중식(閔重植)과 어머니 신상희(申尙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민구관(閔舊官)댁으로 불려졌는데, 당시 충청북도 제일의 부호였다. 민병산의 큰 할아버지는 구한말에 괴산군수와 청주군수를 지낸 민영은(閔泳殷)이었으며, 아버지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나온 엘리트였다. 그가 살았던 상당구 문화동 집은 1천여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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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기업 신흥제분의 창업자. 호는 한암. 본관은 여흥(驪興)으로 경기도 안산군 서운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래는 양반 가문의 천석지기 부호의 장손으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의 유산을 선대가 탕진함에 따라, 어려서부터 고생을 하며 성장하였다. 어려서 어머니를 네 살에 잃고 외가와 숙모댁에서 자랐다. 17살 되던 해에는 민씨(閔氏) 문중이 있는 청주로 와서 친척이 되는 민참령(閔參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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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의 청주지역 학자.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성위(聖威), 호는 창암(滄庵)이다. 사주면 복대리(지금의 흥덕구 복대동)의 독산에서 박익동(朴翼東)의 아들로 태어나 그 뒤 신성동로 이사하였다. 네 살 때에 이미 천자문을 읽고, 일곱 살에 『효경(孝經)』, 『논어(論語)』를 외우는 재질이 있었다. 어머니 상을 당하기에 앞서 17살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려서 효행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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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등을 통해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20년 2월 16일 서울에서 김광제(金光濟) 등 동지와 함께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를 조직하고 간사로 활동하였다. 동회는 노동자의 상호부조와 인격 및 지적향상을 목적으로 한 계몽적 노동단체로서 주로 지식계몽에 주력하였다. 그는 또한 1920년 5월 31일 서울에서 다수의 동지들과 물산장려·상부상조·인권평등에 의한 세계평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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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제1공립중학교 학생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40년 3월 청주제1공립중학교에 재학 중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여 신사참배와 궁성요배 등을 기피하기 위하여 동지들을 규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942년 5월 5일 그가 개교기념일에 전교생이 와우산(臥牛山)으로 등산·행군하던 중에 일본의 패전을 뜻하는 노래를 부른 것이 청주 경찰서에 탐지되어 조사를 받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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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청주지역에서 활동한 교육자.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자는 경홍(景洪)이며, 호는 우당(愚堂)이다. 사인(士人) 박형규(朴亨圭)의 장남이다.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 동양촌에서 출생하였다. 창암(滄庵) 박노중(朴魯重) 선생의 문하에서 다년간 수학하여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을 통달하였다. 1980년 향년 80세로 죽으니 문하생 일동이 묘비를 세웠다. 향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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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청주지역의 유지.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건너가 부를 축적하고 귀국하여 청주지역 발전에 기여한 지방 유지이다.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치상(致祥)으로 교리공파(校理公派) 하복대 문중의 인물로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박흥규(朴興圭),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며, 부인은 청주이씨 이명해(李明海)이다. 자녀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세 아들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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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내 장터의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독립운동가. 충청북도 청원군 출신으로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의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趙仁元)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 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시위군중이 태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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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출신의 교육자, 사회사업가. 1883년 6월 11일 청주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신학문에 눈을 떠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보은삼산공립보통학교 훈도로 교육계에 투신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32년 음성군수까지 역임하고, 해방 후 다시 교육계로 되돌아와 1945년 10월부터 1947년 11월까지 청주여중 교장을 지내고, 학무국장을 역임하였다. 6·25 동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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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성진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재학 중이던 그는 1917년 3월 장일환(張日煥) 등 숭실학교 학생 및 기독교인들과 비밀결사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조직하여 서기 겸 통신원의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동년 6월에는 노덕순(盧德淳) 등과 함께 식지(食指)를 잘라 ‘대한독립’이라 혈서(血書)하고 국민회의 단결과 장래의 활동방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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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청주지역에서 활동한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지방유지이다.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호는 양초(兩草)로 학유공(學諭公) 서도(徐渡)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3·1운동 때 지방 책임자로 활약한 서상갑(徐相甲)이며, 어머니는 반남박씨(潘南朴氏)이다. 부인은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슬하에 1남을 두었다. 족보상에 나타난 서광준[1910~1944]의 이름은 서병준(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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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의 수장으로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천도교 교주. 1897년 해월 최시형(崔時亨)의 뒤를 이어 동학의 제3대 교주가 된 그는 동학의 재건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교세의 재건에 힘쓰는 한편, 국내의 인재들을 일본으로 유학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교도들을 지휘하여 갑진개화운동(甲辰開化運動)이라는 신생활운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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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연극인. 청주고등학교를 거쳐 1977년 2월 충북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였다. 충청북도 증평군 형석중학교 등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였다. 1973년 시민극장과 충북대학교 극예술연구회를 통하여 연극에 입문하여 청주를 근거로 왕성하게 활동한 연극배우였다. 1973년 시민극장에 입단하여 제5회 전국소인극경연대회에 「옹고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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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청주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호는 춘계(春溪)이다.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부탄리에서 1865년 송수일(宋秀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비범한 재주를 보여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스스로도 성현의 덕행으로 부모님을 편안히 모시고, 친상에는 3년을 하루같이 추모하였다.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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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해외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12년 4월 중국 항주의약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동제사(同濟社)와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23년 4월 중국군 중교(中校)로 항주군의학교 외과 주임에 임명된 이후 중국군으로 복무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1939년에는 중경(重慶)으로 이전한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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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30일 이용실(李容實)·이수란(李水蘭) 등과 함께 미원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부터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장터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자, 일본 헌병은 태극기를 빼앗으며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지휘하던 그를 주재소로 연행하여 감금시켰다.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이 주재소로 몰려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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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에 크게 기여한 독립운동가. 구한말 계몽운동을 펼치던 중 1905년 을사오조약을 강제 당하자, 이에 분개하여 자결을 기도, 그 여파로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상해로 망명,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가하여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다. 1912년 이후 동제사, 신한혁명당 등 각종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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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출판문화인. 1927년 7월 20일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산덕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신재한(辛在漢)이며, 어머니는 김대련(金大湅)으로 2남 3년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29년 아버지가 죽자 1932년 청주로 이주하여, 초등학교와 중등과정을 마치고 신흥대학교(현 경희대학교)에 수영특기생으로 입학 1948년 런던올림픽 대표선수로 선발되었으나 늑막염의 발병으로 포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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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회복운동과 국내외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07년 4월에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서울과 충청북도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에는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1909년에는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성 일대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데 노력하였고, 귀국 후 3·1운동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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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07년 서울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서울 수표교교회에서 재임하던 1919년 2월 중순경, 오화영(吳華英)으로부터 3·1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동참하기로 결심하였다. 이해 2월 28일, 그는 손병희(孫秉熙)[1861~1922]의 집에서 열린 민족대표의 최종 회합에 참여하였고,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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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때 청주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던 독립운동가. 1919년 당시 서울의 중앙학교(中央學校) 재학생으로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귀향하였다. 그는 3월 9일 청주농업학교(淸州農業學校) 기숙사로 가서 농업학교 학생들에게 서울의 독립만세운동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청주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자고 제의하여 찬성을 얻어 「독립선언문」과 경고문 등을 제작하고 인쇄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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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1943년 10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징집 당하여 중국 남경지구(南京地區)의 일본군 부대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중경(重慶)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1944년 5월 한국광복군에 입대할 것을 결심하고 일본군을 탈출한 후 우선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어 1945년 4월 중국 중경에 도착하여 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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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언론인·독립운동가·문인.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이다.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大德郡) 산내면(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열혈생(熱血生), 한놈, 검심(劍心), 적심(赤心), 연시몽인(燕市夢人) 등이다. 조선시대 신숙주(申淑舟)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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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30일 미원장터에서 전개된 군내 최대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1시경 1천여 명의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때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주도자를 강제로 주재소로 연행해가자 군중들과 주재소로 쇄도하여 투석전을 벌이는 등 격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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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독립을 청원한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여종(汝宗), 호는 우석(友石)이다. 참봉 신현기(申鉉基)의 장남으로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서촌동 179번지[동촌로116번길 23]에서 출생하였다. 대사성을 지낸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문하에서 다년간 수학하여 시문에 뛰어났다.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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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한 독립운동가. 1920년 음력 8월경 신흥구(申興求)·이종만(李鍾萬) 등과 함께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활동을 펴기로 결의하고 유영창(柳永昌)·한병호(韓秉浩) 등을 동지로 포섭하여 비밀결사 평양결사단 청주지부를 조직하였다. 이후 그는 동지들과 함께 모의권총을 소지하고 충청북도 일대를 중심으로 군자금 모금활동을 펴던 중 일경에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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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35세 때에 청주북감리교회에서 미국인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1913년 서울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서 공주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917년 평양남산현교회(平壤南山峴敎會) 목사로 옮겨 재임하던 1919년 2월, 동지의 규합을 위해 평양에 온 이승훈(李昇薰)으로부터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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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벌인 독립운동가.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신형식(申亨植)·신학구(申學求) 등 문중 사람들과 같이 3월 30일 청원군 미원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 후 일경의 추적을 피해 잠적하였다가 1920년 9월에 동지인 이종만(李鍾萬)의 집에서 신형식 등과 비밀리에 회합하여 상해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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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30일 같은 동리에 거주하는 박우동(朴雨東)과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각 동리에 돌리며 거사를 준비하였다. 4월 1일 거사 당일 청원군 미원장터에서 인근 주민 다수를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는 전날 격렬한 만세시위로 인해 대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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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에서 활동한 교육자.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는 자하(紫霞)이다.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에서 태어났다. 청주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대 법과를 졸업하였다. 1938년부터 괴산군청 등에 재직하였다. 해방 후에는 교육계에 뜻을 두어 청주고등학교, 공주교육대학교 등 여러 학교에서 교장을 지냈다. 그 후 청주교육대학에서 1963년 7월부터 1964년 3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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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30일 오후 2시경 청원군 미원장터에서 신성휴(申聖休) 등과 같이 군중 1천여 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이 때 출동한 일본 헌병이 주도자를 연행해가자 그는 시위군중들과 함께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연행된 동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에 투석을 하는 등 격렬히 항의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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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김학규 지대장이 이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되어 남경지구(南京地區)에서 초모활동과 군사훈련 등의 활동을 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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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907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11년 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건설운동에 주력하였다. 그는 경학사(耕學社)의 조직에 참여했고 일시 신흥학교의 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이른바 무오독립선언 때에는 39인의 대표 중 1인으로 참가하여 서명하였다. 1919년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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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청주시장을 지낸 행정가. 1949년 8월 15일부터 1951년 10월 15일까지 약 2년 2개월간 초대 청주시장을 역임하였으며 본적은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이다. 가족은 5남 1녀를 두었고 단양군수 등을 역임한 이종혁이 둘째 아들이고, 청주대학교 2대 총장과 전주대학교 총장을 지낸 이종익(李鍾翊) 박사가 셋째 아들이다. 지방의회에서 선출된 초대시장 이규석은 19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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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군 출신의 실업인이며 언론인, 교육사업가. 호는 문헌이며,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 노현리에서 이예승(李禮承)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제2고보(지금의 서울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1946년 30대의 청년으로 일신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50년에 남한제사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 청원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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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이며, 충북지사를 역임한 행정가. 호는 가동(可東). 본관은 한산(韓山)으로 고려 말의 학자 인재공 이종학(李種學)의 19대손이다. 인재공은 목은(牧隱) 선생의 둘째 아들이니, 그는 명문의 후예로 청원군 오창면 백현리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15세까지 소학, 사서 등 한문을 수학하고, 그 후 신학문에 접하여 사립 보성중학을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나왔다. 전문학교를 마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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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에서 성장한 정치인. 1940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과를 입학하여 이듬해인 1941년에 중퇴하였다. 30여 년 야당 외길을 걸으며 6선에 국회부의장을 지낸 정계의 거목(巨木)이었다.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두 김씨(金氏)와 같은 세(勢)를 누리지는 못하였지만 1980년대 중반 정치 암흑기에 제1야당 당수로서 정계의 핵으로 활약했다. 해방직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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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한 독립운동가. 함경남도 신흥군 신흥면 279번지에서 1914년 6월 25일 과수원을 경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1927년 신흥군 신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0년 신흥공민농업학교를 졸업했다. 1939년부터 3년간 중국 산시성(陝西省) 태원시(太原市)에 있는 산시성립 원예시험장에서 연수를 받았다. 신흥공민농업학교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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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순국한 독립운동가. 1919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날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한봉수(韓鳳洙)[1883~1972]로부터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부탁받았다. 이에 그는 동지들과 상의하여 3월 30일 미원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정하고,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참가를 종용하는 등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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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에서 활동한 문화예술인, 음악인.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에서 출생하였다. 1940년대부터 충청북도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하여 1949년 문교부에서 주최한 전국 남녀고등학교 음악발표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청주사범 관악대가 참가하여 좋은 반응을 받았다. 그 이후 충청북도 음악협회 지부장, 충북예총 지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청주교육대학교 교수로 재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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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의 서예가.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에서 태어나 청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시암 배길기 선생의 사사와 함께 서예교사 양성소를 거쳐 중등교사로서 교직에 종사하며, 서예를 통한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가 평교사로서 정년퇴임한 후 74세로 생을 마치셨다.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를 지냈으며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대한민국서예전람회 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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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회를 조직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리농업학교 재학 중인 1943년에 동교생 장지환(張志煥) 등을 동지로 규합하여 항일결사 화랑회(花郞會)를 조직하고, 대표로 활약하였다고 한다. 화랑회는 일제 식민지 통치에 대한 항거를 목적으로 한 행동결사로서 무력봉기를 계획하였다. 이들의 행동방략은 우선 총기 및 폭약 등을 탈취하여 무장을 갖춘 후 주재소 및 경찰서를 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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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출신의 의료인. 청주중학교을 거쳐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병리학교실에서 2년 남짓 연구하고, 1941년 청주 상당치과의원을 개업했다. 1947년에 사재를 털어 고향에 한국 최초의 보건소를 설립, 운영했고, 토지개혁 이전인 1948년에 1백섬 지기의 땅을 소작인들에게 시가의 반값에 주었다. 한국동란 때는 북한군에 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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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30일 오후 1시경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에서 이수란(李水蘭)·신경구(申敬求) 등 동지들과 같이 1천 여 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때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신경구 등 동지를 연행해 가자 그는 군중들을 인솔하여 주재소로 달려가 투석전을 전개하며 격렬하게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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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국운이 기울어가던 한말. 함경남도 안변군 배화면 수여리 5번지에서 태어나 만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길림성(吉林省)에서 세운 제일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 신창학교와 길흥고등소학교 등을 설립, 육영사업에 투신하였다. 길림성 한교동향회(韓僑同鄕會) 상무 간사에 1929년 2월 임명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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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을 전개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원활동을 벌인 독립운동가. 경술국치를 통분히 여긴 그는 스승 김제환(金濟煥)과 함께 일제에 항거하다가 1913년 일경에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 후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그는 1920년 2월 서울에서 김광제(金光濟) 등과 더불어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를 조직하여 노동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해 5월에는 김영만(金榮萬) 등 89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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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1932년 10월 8일에 청주에서 태어났다. 주성초등학교, 청주공업고등학교(현 청주기계공업고등학교), 청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65년 결혼을 하였으며, 충청북도청에 취직하여 회계, 감사직에 주로 근무하면서 청렴결백하여 맡은바 업무를 훌륭하게 처리한 공로로 대통령으로부터 표창, 훈장을 받았고, 1996년에 사무관으로 퇴직하였다. 일찍이 사진에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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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등 항일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 1918년 동지들과 같이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청년구락부(靑年俱樂部)를 조직하고 기관지로『신청년(新靑年)』을 발간하였다. 1920년 3월 17일에는 『신조선(新朝鮮)』잡지의 기자로서 이달(李達) 등과 같이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동지를 규합하여 시위운동을 결행할 것과 일본 제국의회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계획을 추진하려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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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청주지역의 유지.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자는 기범(箕範), 호는 한은(翰隱)으로 전서공파(典書公派)의 인물이다. 아버지는 임재천(林在天), 생부는 장예원경(掌隷院卿)에 증직된 임순상(林舜相)이다. 어머니는 성주배씨(星州裵氏), 생모는 경주김씨이다. 세 명의 부인을 얻어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1902년 관직에 나아가 내부주사(內部主事)를 지냈으며, 1910년에는 중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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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 음악인. 경상북도 영천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를 거쳐 청주대학교 명예교수를 지냈다. 1961년 일본에서 개최된 동아음악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으며 국립국악원 도일(渡日)공연 및 일본 초청 강연을 가졌다. 세종(世宗)대왕 아악실위원, 한국국악교육연구회장, 서울대학교 부설 동양음악연구소장, 청주대학교 민족음악자료관장을 지냈다. 1968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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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순국한 독립운동가. 1919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약한 한봉수(韓鳳洙)[1883~1972]로부터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부탁받고, 동지들과 상의하여 3월 30일 미원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의하고 부락민을 동원하였다. 그는 이날 미원장터에서 1천여 명의 시위군중 앞에서 「독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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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열녀.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아버지는 김계선(金啓先)이고, 남편은 성산전씨(星山全氏) 전병화(全炳華)이다. 1911년에 출생하였으며 일찍 아버지를 여의자 홀로 남으신 어머니를 위하여 효를 다하였다. 16세에 성산인(星山人) 전병화에게 출가하여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남편이 일본에 갔다 와서 병을 얻어 여러 달 고생을 하였는데 부인은 지성으로 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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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30일 청원군 미원 장터에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인근의 미원 헌병주재소에서 헌병이 출동하여 주도자를 연행하여 갔다. 이에 격분한 그는 군중들과 함께 주재소로 쇄도하여 투석전을 전개하며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사태의 위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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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항쟁을 하다가 피체되어 순국한 독립운동가. 1907년 4월 초에 고향 청주에서 한봉수(韓鳳洙)[1883~1972]와 함께 의병으로 봉기하여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하였다. 5월 10일(음력)에는 괴산군 서면 모래재[沙峙]에서 한봉수와 함께 일본 수비대 2명이 우편물을 호위하며 통과하는 것을 확인하고 습격하여 일본군 2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물품을 노획하였다. 한편 청주군 북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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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출신의 상공인, 정치인 청주중학교을 거쳐 연희대학 경제과를 졸업하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재질로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고, 한때 향토 일간지인 국민일보사에 입사하였다. 제2세 교육을 위해 청주공업고등학교, 청주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뒤 충북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5·16군사혁명 이후 충청북도 민주공화당을 창건하는데 협조하고, 1963년에는 청주에서 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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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의열단에 참여하고, 구미 열강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인 독립운동가. 일찍이 만주로 건너갔다가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신규식(申圭植)[1879~1922]의 밀명을 받고 국내에 들어와 스코필드 박사가 촬영한 일제의 학살 장면 등의 사진 50매를 임시정부에 전달하여 일제의 잔인성을 세계에 폭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활동과 연유해서 1919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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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강내면에서 횃불시위를 주도하여 인근지역의 만세시위를 파급시킨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23일부터 3일간에 걸쳐 밤마다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 산위에서 부락민 수십명과 함께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첫날인 23일에는 면내의 18개 부락과 인접한 강외·옥산·남이면 등지에서도 호응하여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일제는 청주와 조치원 등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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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진위대 해산군인 출신으로서 의병에 참전하였다가 순국한 독립운동가. 1907년 7월 청주 진위대(淸州鎭衛隊) 일등병 출신으로서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에 항거하여 의병장 노병대(盧炳大)의 우익장(右翼將)으로서 충청북도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 후 동년 9월경 의병장이 되어 의병 70여 명을 이끌고 청주·보은 부근에서 활동하다가 1908년 10월 일경에게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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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강점에 분개하여 스스로 자결한 애국지사. 유생으로서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병탄하여 나라가 망한 현실에 통분하여 죽음으로써 항의하기로 결심하고, 이 해 10월 27일 의관을 깨끗이 갈아입은 다음 단식을 결행하여 결국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충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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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에서 활동한 산악인. 1961년 1월 20일 충청남도 논산에서 2남 5녀의 셋째로 태어났으며, 1999년 4월 29일 네팔의 안나푸르나(Annapurna Mt.)[8,091m] 등정 후 하산길에서 실종되었다. 1979년 청주사범대학교(현 서원대학교) 미술교육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산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대학교 3학년이 되던해인 1981년에는 청주사범대학교 산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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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의 행정가.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에서 채성용(蔡成用)과 김순임(金順任)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청주시 총무과장을 거쳐 보은, 옥천, 음성, 청원군수를 지냈다. 보은군수를 지낼 때는 말티재 도로를 넓히고 정비하였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 청주시장을 재임하는 동안 1971년 무심천(無心川)에 벚꽃나무를 심고, 우암산 우회도로를 만들었다.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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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청주지역의 유지. 본관은 인천(仁川)이며, 자는 영록(永錄), 호는 학초(學樵)이다. 고려말 두문동 72현의 한 분인 전서공(典書公) 채귀하(蔡貴夏)의 후손이며,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채종길(蔡宗吉)의 10세손이다. 아버지는 채상학(蔡相學), 어머니는 경주김씨(慶州金氏), 부인은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아들로는 채기영(蔡基榮)과 채기달(蔡基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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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각종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주도한 독립운동가. 1907년 충남 목천(木川) 교회 전도사로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이시영(李始榮)·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경학사(耕學社)와 부민단(扶民團) 등 한인 단체를 조직하여 재만 한인의 경제적 지위 향상에 노력하는 한편 독립운동기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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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출신의 정치인, 법조인. 청주고등보통학교(청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법전을 졸업했다. 1943년에 청주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이 지역 후학의 교육 발전을 위해 힘썼다. 1947년에는 변호사 시험을 거쳐 1951년에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청년변호사로 엄정하고 공정한 변론으로 명망이 높았다. 전쟁이 끝나고 1960년 청주대학교 강사로 강단에 서기도 했는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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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의 언론인 겸 문인. 1932년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에서 태어났으며, 2001년 10월 10일 숙환으로 사망했다. 1943년 청주사범학교에 입학하였고 1955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1958년 청주문화원장에 취임하였고 1959년에는 청주여자고등학교 교사 1960년에는 전국 문총 충북지부장, 1962년에 한국예총 충북지부 결성과 함께 초대지부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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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신정리에서 출생하였다. 서라벌예술대학을 졸업했다. 충청일보 기자와 문화부장, 광고부장을 거쳤으며, 극단 시민극장 창단 멤버로 연극활동을 본격 시작했다. 단원활동을 시작으로 시민극장 대표까지 역임했다. 1960년대 말기 최석하는 민병인, 박태련, 조중현, 김순지 등과 함께 청주 연극의 기둥이 되어 활동을 벌여왔다.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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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결사 다혁당에 참여하여 학생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인 1941년 2월 15일 동교생 권쾌복(權快福) 등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 대봉정(大鳳町) 소재 유흥수(柳興洙)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학생 비밀결사인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였다. 다혁당은 앞서 결성되었던 동교의 항일학생조직인 문예부(文藝部)와 연구회(硏究會)를 계승·발전시켜 조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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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출신의 아동문학가·교육자 1897년 11월에 상당구 남문로1가에서 아버지 최순오(崔順五)와 어머니 성주(星州) 이씨(李氏)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청주보통학교(현 주성초등학교)와 청주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16년에 청주군 북일면의 면서기로 공직 생활을 시작으로 2년 후에는 청주면사무소로 전근했다가, 1923년에 사립 청남학교 교사가 되어 교육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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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에는 의병장으로 국권회복운동을 하였으며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07년 의병투쟁에 나선 이후 1910년 5월 일제에 피체될 때까지 충청북도 일원은 물론 경상·강원지역 등 광범한 지역을 무대로 20여회에 걸쳐 격렬한 투쟁을 벌인 중부지방의 후기 의병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한봉수(韓鳳洙)[1883~1972]는 평민으로 구성된 소규모의 부대를 이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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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군 출신의 공무원.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에서 태어났다. 청주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관계에 투신하여 충청북도 농무과장을 거쳐 충청북도 농촌진흥원장을 역임하면서 충청북도의 농촌경제 안정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962년 충청북도 농촌진흥원장을 정년퇴임하고 대한적십자사 충북지사장으로 70세가 넘어서까지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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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에서 활동한 언론인이며, 행정가.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호는 청곡(淸谷)으로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에서 태어났다. 경성협성실업을 졸업한 뒤, 언론계로 투신하였다. 동아일보 인천주재 기자를 시작으로 광복 이후에는 동아일보 청주지국장, 주간동아 충북판 발행인, 지금의 충청일보 전신인 충북신보 주간 등을 역임하며 언론활동을 하였다. 초대 충북도의회 의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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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원 활동을 벌인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1일 천도교인으로서 최동호(崔東昊) 등과 함께 조선은행 앞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해 5월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적극 협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기관지인『독립신문(獨立新聞)』제작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서울에서 최동호·정창수(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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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군정서 의용대원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순국한 독립운동가.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의용대원(義勇隊員)으로 항일운동을 하던 중 일경에게 피체되어 1922년 5월 16일 평북 강계(江界) 벌등진(伐登鎭)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