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6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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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開南部隊-淸州城戰鬪 |
영어음역 | Kim Gaenam Budaeui Cheongjuseong Jeontu |
영어의미역 | Cheongjuseong Battle of the Kim Gaenam Uni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신영우 |
[정의]
1894년 동학농민군의 2차봉기 때 청주성을 공격했다가 일본군의 기습으로 패배한 전투.
[개설]
청주성은 동학농민전쟁 당시 스나이더 등 신식무기로 무장한 진남영 병대가 방어하는 요지였다. 9월 재봉기시 전봉준(全琫準)의 남접군에 합세하지 않은 김개남(金開南)은 전라도 남원에서 2만5천여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독자적으로 북상하면서 12월 9일(음력 11월 13일) 청주성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 때 상원영차랑(桑原榮次郞) 소위가 지휘하는 1개소대 규모의 일본군이 현재의 서원대학교 뒷산으로 추정되는 배측면(背側面) 고지에서 기습한 것을 막지 못하고 전면 퇴각하였다.
[발단]
청주성은 전라도와 충청도 남부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이 서울을 향해 북상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1894년 가을 동학농민군과 진남영병, 일본군 사이에 3차례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김개남 군의 청주성 공격은 그 마지막 전투였다. 남접농민군의 김개남은 전라북도의 남원과 임실에 주재하면서 이 일대의 동학농민군을 이끌던 핵심지도자로서 전봉준 장군과 세력과 견줄 정도로 큰 세력을 관장해 왔다.
9월 하순 전라북도 남원에 동학농민군을 집결시킨 김개남은 10월에 전봉준이 재봉기를 결정하고 완주군 삼례에 남접농민군을 집결시켰을 때 이에 동조하지 않고 독자활동을 펴 나간다. 11월에 들어와서 비로소 북상을 결정한 김개남은 임실을 거쳐 전주에서 동정을 살피다가 12월에 휘하 동학농민군을 은진, 연산, 금산, 진잠, 회덕을 거쳐 청주성으로 진군시켰다. 공주성을 공격하던 전봉준 부대와는 다른 경로로 서울로 올라가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경과]
동학교단의 기포령 직후 청주 일대에서 결성된 동학농민군의 공격을 자력으로 막아낸 청주성은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다. 일본군 척후보고에 의하면 김개남부대의 병력은 2만5천여명에 달했다. 청주성에 주둔한 진남영병은 신식 소총인 스나이더소총을 지급받은 정예 관군이었으나 10월 31일 대전평(大田坪)을 순행하던 병대 73명이 동학농민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하여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진남영장의 요청을 받아 청주성 방어에 합세한 일본군은 군로실측대(軍路實測隊)를 호위하던 1개소대 병력이었다. 김개남 부대는 신탄진 방향에서 올라온 1만5천여명과 문의 방향에서 진군한 1만여명이 청주성에서 1.5㎞ 지점에서 합세하였다. 청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전진하던 동학농민군은 남문의 500m 지점에서 맹렬한 사격을 하던 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혼란에 빠졌다.
이 때 김개남 부대를 공격한 일본군은 군로실측대를 호위하던 1개 소대로서 소위 상원영태랑(桑原榮太郞)이 지휘하였다. 남문 앞 600m 떨어진 고지(현재의 서원대학교 뒷산으로 추정됨)에서 역습을 받은 동학농민군은 20여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문의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에게 노획한 물품은 깃발 수십폭, 활과 화살 수천개, 모젤총 실탄 140발, 둥근 총알 2000발, 화약 150㎏, 구식대포 2문, 우마 50여두였다. 김개남부대는 청주성에서 패배한 후 문의에서 재집결하여 한 차례 전투를 벌인 후 후퇴하여 진잠을 거쳐 전라도로 돌아갔다.
[결과]
김개남 부대는 청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뒤 1894년 봄에서 겨울에 걸친 시기에 가졌던 강력한 위용을 상실하였고, 청주성은 동학농민군의 공격을 더 이상 받지 않고 관치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