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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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琢 |
영어음역 | Jeong Ta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석린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 백곡(栢谷)이다. 예천 출신으로 현감 정원로(鄭元老)의 증손자로 정이충(鄭以忠)의 둘째아들이다.
[활동사항]
1552년(명종 7) 성균생원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급제, 1565년 정언을 거쳐 예조정랑·헌납 등을 지냈다. 1568년(선조 1)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고,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 이조좌랑이 되고, 이어도승지, 대사성,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581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장령 정인홍(鄭仁弘), 지평 박광옥(朴光玉)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간원의 임금에게 청하여 이조참판에 전임되었다.
1582년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 예조판서,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1589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시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이순신(李舜臣)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 중에 공을 세우게 하였으며,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72세의 노령으로 스스로 전장에 나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려고 하였으나, 왕이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였다. 특히 이해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을 극력 변명하고 구원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하였다.
1599년 병으로 일시 귀향하였다가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올랐으며, 1604년에 호종공신 3등, 서원부원군에 봉해졌다. 1605년 80세로 예천에서 죽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학문과 사상]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경사(經史)에 뛰어나고, 천문, 지리, 상수(象數), 병법 등에 학식이 깊었다.
[저술]
저서로는 『약포집(藥圃集)』, 『용만견문록(龍灣見聞錄)』이 있다.
[제향]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