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4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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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郭 |
영어의미역 | Castl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조선/조선 |
집필자 | 이희돈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지역에 분포하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흙이나 돌로 축조한 방어 시설.
[개설]
우리나라의 성을 종류에 따라 구분하면 도성·읍성·산성·행성(장성)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산성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다. 산성은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쌓기 때문에 적으로부터 쉽게 노출되지 않고, 또 성에서 오래 항전을 계속할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을 갖추었다. 성벽은 산꼭대기로부터 골짜기에 걸쳐 고리 모양으로 돌아나가고 가장 낮은 쪽 근처에 성문과 수구를 설치하고 가장 높은 곳에 망루를 세웠다. 산성은 대체로 골짜기를 감싸고 축조되므로 성 안에 많은 병마를 주둔시킬 수 있었고 군량 창고, 병영, 장대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성벽과 관련된 시설물로는 성문, 와성, 여장, 치, 각루, 암문, 수구 등이 있었다. 골짜기에는 성문을 설치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으며 성문 주변의 성벽은 큰돌을 사용하여 튼튼하게 쌓았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성곽이 나타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에 평양성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처음이며, 이는 대체로 기원전 2세기에 해당된다. 백제 초기에는 풍납토성(風納土城)과 132년(개루왕 5)에 축성된 북한산성(北漢山城)이 지금도 사적으로 남아 있어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그 후 삼국시대를 통하여 나라마다 많은 성을 축조하였고, 그 중에서 신라의 삼년산성(三年山城)과 월성(月城)은 그 당시의 대표적인 성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의 축성술은 이 무렵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우리 지형과 환경에 맞는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 말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연해 읍성의 축조가 계속되었으며, 북방 변경에는 행성의 축성이 이루어졌다. 특히 세종, 성종 대에 읍성 축조가 활발해 새로 성을 쌓고, 고려시대의 토성을 석성으로 바꾸는 한편 규모를 확장하였다. 성곽 축성 기술도 세종 때 이르러 기술적으로 크게 발전하여 도성의 수축 공사에서 가로 50㎝, 세로 20㎝ 정도의 다듬은 화강석을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철과 석회를 사용하였다. 성곽의 구조에서도 15도 안팎의 경사를 유지한 안정된 모습을 보여 준다. 조선 전기에는 읍성과 함께 산성 축성도 계속되었다.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 청도의 오혜산성(烏惠山城), 구미의 금오산성(金烏山城), 경주의 부산성(富山城), 남원의 교룡산성(蛟龍山城), 담양의 금산성(金山城), 정읍의 입암산성(笠巖山城), 고산의 이흘음산성(伊訖音山城), 도강의 수인산성(修因山城), 나주의 금성산성(錦城山城)이 수축되고, 서북방에는 성주의 흘골산성(屹骨山城), 자주산성(慈州山城), 덕주의 금성(金城), 삭주성(朔州城), 양덕성(陽德城), 강계성(江界城), 백벽산성(白壁山城), 향산성(香山城) 등을 신축 또는 개축하였다.
[가산산성]
가산산성은 면적 194,742㎡, 길이 11.041㎞로 가산면 가산리 산 98-1 외 11필지에 위치하는 조선시대의 석축 산성이다. 사적 제216호로 지정되었고 주변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산성은 해발 901.6m의 천험(天險)의 가산 골짜기를 이용하였고 내·중·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 사대문지와 암문·수구문·건물지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성 내에는 물이 풍부하여 산성 입보의 시설을 갖추고 있고 내·중·외성은 각기 시대에 따라 따로 축성되었다. 산정엔 나직한 7개의 봉으로 둘러싸인 평정이 사방으로 7개의 곡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왜병을 물리친 천생산성[구미시 지방기념물 제12호]과 6·25전쟁 당시 대구 사수의 격전지였던 유학산에 연결되어 산성을 축조할 만한 충분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가산산성은 처음에는 1640년(인조 18)에 관찰사 이명웅(李命雄)의 요청으로 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1648년(인조 26)에 중수되었다. 성은 석성으로 둘레는 4,710보(步)이고 여장(女墻) 1,887첩(堞)이 설치되었으며, 동·서·북문의 삼문과 8개소의 암문·연못 9개소·우물 2개와 장대인 진남대(鎭南臺)·창고 7개소·빙고(氷庫) 1개소·사찰 4개소 등이 설치되었다. 성이 완성되면서 칠곡도호부가 되고 군위, 의흥, 하양, 신녕 등의 고을이 산성에 예속되었다. 외성은 1701년(숙종 27)에 석축으로 축조된 것으로 둘레는 3,754보이고 1,890첩의 여장을 두었으며 성문은 남쪽에 만들고 북·동·남쪽에 암문을 설치하였다. 중성은 1741년(영조 17)에 관찰사 정익하(鄭益河)의 요청으로 길이 602보이고 402첩의 여장과 중성문이 만들어졌다. 산성 별장이 거처하는 위려각(衛藜閣)을 비롯하여 성안에는 객사(客舍)인 인화관(人和館)을 비롯한 관아와 군관청, 군기고, 보루(堡樓), 포루(砲樓), 장대(將臺)가 설치되어 행정적이라기보다는 방어를 위한 군사시설이 압도적으로 많아 군사용 진성(鎭城)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중요 시설은 내성 안에 있으며 중성에는 산성에 입보(立保)할 예정된 네 고을의 창고가 있어 비축미와 군기(軍器)를 보관하여 유사시에 사용하게 하였다. 성은 외성 남문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성의 주변에는 송림사를 비롯한 신라시대의 절 터가 많이 있다. 1954년의 집중 폭우로 남문에 홍예(虹霓)는 반파되고 수구문과 성벽 일부가 유실되었다. 그 밖의 성벽과 암문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세는 천주사지(天柱寺址)로부터 급경사를 이루어 가파른데 약간 평탄해진다. 성문은 외성의 남문이 홍예문이며, 다른 성문들은 앞쪽만 홍예이고 뒤쪽을 평거식(平据式)으로 만든 특수한 문의 구조로 되어있다.
성 내 사방에 포루, 장대, 남창, 군창, 영창, 군기창, 장적고 등의 창고와 문루가 있었다고 하나 남아 있는 곳은 없으며 다만, 남창마을과 북창마을의 명칭에서 남창지와 외북창지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 외, 중성과 동문, 동암문은 보존되고 있다. 또한 산성 내에는 보국사, 천주사 등 많은 사찰이 건립되어 승장을 뽑고 승려들을 모아 궁술을 연습시켰다고 하나 현재 일부 사지의 주위에 당간지주만 남아 있고, ‘장군정(將軍井)’이라 하여 장군들이 마셨다고 하는 우물이 남아 있어 산성 내에 많은 병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남문루 및 남문의 성곽과 수구문, 여장(女墻:성위에 낮게 쌓은 담. 활이나 총을 쏘기 위한 타구가 있다) 185m, 중문 등을 복원, 중수하였으며 1992년에는 중문을 보수하였고 1999년에는 산성 진남문여장, 동문 해체보수, 동문 성곽 99.5m를 보수하였다.
[관호토성]
관호토성은 삼국시대에 축성된 토성이며 칠곡에서는 백포산성이라 불리고 있다. 약목면 관호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랜 역사를 겪는 동안 지금은 본래의 형태를 찾아보기는 힘들고 다만 성의 기초 부분과 벽의 일부만이 남아 있어 대략적인 원래의 형태를 추측할 따름이다. 이 성지는 주위로부터 약간 떨어져 구릉지대를 이루고 있어 오래전부터 군사적으로 이용된 곳이라 볼 수 있고 성터 안에 흩어져있는 유물과 성의 기본 형태로 보아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토성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성곽은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으며 내성은 동서의 길이가 약 18m, 폭이 50m 가량이고 북쪽으로 구릉 지대를 따라 100m 가량 바깥에 외성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서쪽 성벽과 낙동강에 닿는 남쪽 성벽이 비교적 완전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남쪽 성벽의 높이가 약 6.5m에 달하고 있고 흙과 돌의 혼합으로 축조된 성벽이 부분적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