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9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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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具常 |
영어음역 | Gu Sang |
이칭/별칭 | 구상준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이광수 |
[정의]
칠곡군 왜관읍에서 활동한 현대 시인.
[개설]
구상의 전 생애에 흐른 시의 사상은 종교와 진리의 총체로서 ‘오늘 속의 영원과 영원 속의 오늘’을 추구하는 것이다. 구상(具常)은 본명이 구상준(具常浚)이며 아버지인 구종진의 나이 50세, 어머니의 나이 44세 되던 1919년 9월 16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 642번지에서 태어났다.
구상이 네 살 되던 해 수도원의 교육 사업을 위촉받은 아버지를 따라 함경남도 원산으로 이주하여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면 어운리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불안하여 대부분 지식인의 생애가 그러했듯이 시인 구상도 청년기를 힘들게 보냈다. 문학이라는 그릇 속에 시대적인 불운과 반항심을 담아 내며 유랑 생활도 했다.
천주교 집안 출신으로 소신학교(小神學校)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1년에 도쿄[東京]의 니혼대학[日本大學] 종교과를 졸업했다. 이 시기에 프랑스와 서구의 급진 사상을 경험한 뒤 1942년 귀국해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의 동인지 시집 『응향(凝香)』에 「밤」, 「여명도(黎明圖)」, 「길」 등의 시를 발표해 문단에 데뷔했으나 1947년 동인지에 발표한 「여명도」, 「길」 등의 작품이 반사회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반동작가로 비판받자 월남했다.
시를 비롯해 희곡과 시나리오·수필 등의 작품 활동도 꾸준히 병행했다. 작품 세계는 기독교적 존재론을 기반으로 미의식을 추구하는 한편, 기독교적 구원 의식을 바탕으로 전통 사상과 선불교적 명상 및 노장 사상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정신 세계를 수용해 인간 존재와 우주의 의미를 탐구하는 구도적(求導的) 경향이 짙다.
또 시적 기교와 이미지에 주력하기보다는 풍부한 의미와 암시를 자아내는 평범한 시어를 택해 존재와 현상에 대한 의식을 형이상학적으로 담아내는 점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그의 시는 1986년 프랑스 파리에서 시집 『타버린 땅』이 프랑스어로 출간된 것을 시작으로 영국·독일·일본·스웨덴·이탈리아에서 번역 출판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현재 구상 문학관이 있는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789번지는 구상 시인의 본적지이다. 구상에게 있어 왜관의 관수재는 아내와 자식들과 사랑을 쌓았던 곳이며, 독일인 신부와 함께 북한에서 억류됐던 신부인 형과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낸 곳이기도 하기에 더욱 애틋하다. 구상이 살았던 서울의 아파트 문 앞에도 ‘관수재’라는 명패를 붙이고 있을 만큼 구상에게는 ‘관수재’에 대한 남다른 추억이 서려 있다.
구상의 집 ‘관수재’는 ‘관수세심(觀水洗心)’의 뜻으로 낙동강변이 바라보이는 집에서 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닦는다는 자세로 시를 쓰고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며 쓴 명칭이다. 구상은 1953년부터 1974년까지 20년 동안을 베네딕도 왜관대수도원이 있는 왜관의 관수재(觀水齋)에서 아내 서영옥 여사[1994년 타계]와 함께 보냈다.
구상이 그 파란만장했던 청년기를 보내면서 폐병으로 고생할 때, 아내는 의사로서 남편의의 생명줄을 잡아주었다. 구상의 형인 구대준 신부가 주임신부로 있었던 흥남천주교회에서 운영하던 대건의원 의사로 근무했던 서영옥 여사는 그 곳에서 구상 시인과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6·25전쟁 속에서 폐허가 되었던 낙동강과 주변의 산하, 전후(戰後)의 낙동강을 바라보는 구상 시인에게 자신을 풀어내는 본질은 오직 시심(詩心)이었고 칠곡군과 낙동강은 구상에게 있어서 구도자적 시의 원천이었다. 구상은 2004년 5월 11일 오전 3시 40분에 서울에서 타계하였으며 빈소는 강남성모병원 영안실 1호실에 있었고 5월 13일 발인하였다. 경상북도 칠곡군에서도 구상이 타계한 5월 11일 구상 문학관에 분향소를 설치하여 발인일인 13일 오전 12시까지 일반인들의 조문을 받았다. 구상은 경기도 안성의 가톨릭묘지에 안장되었다.
[활동사항]
1942년에서 1945년까지 원산에서 『북선매일신문(北鮮每日新聞)』 기자로 잠시 활동하였고, 1948~1950년에는 『연합신문』 문화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또 6·25전쟁에서 종군작가단 부단장으로 활약했다.
1950년에서 1953년까지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를 만들었고, 1953년에서 1957년까지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 매일신문 상임고문을 거쳐 1961년에서 1965년까지는 『경향신문』, 『가톨릭신문』 등의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을 지냈다. 교육계 경력으로는 1952년에서 1956년까지 효성여자대학교 문리과대학 부교수, 1956년에서 1958년까지 서울대학교, 1960년에서 1961년까지 서강대학교 문리과대학 전임강사로 강의를 맡은 일도 있었다.
구상의 인맥은 문단, 예술계, 정치계, 경제계에까지 넓게 분포되어 있었으며, 죽마고우로서 화가 이중섭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관수재에서 구상과 함께 기거하고 교분을 쌓았다. 1970~1974년에는 미국 하와이대학교 극동어문학과 조교수로 초빙 받았다. 1973년에서 1975년에 가톨릭대학 신학부 대학원 강사로 있었고, 1976년에서 1979년까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었다.
1979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82년에서 1983년에는 중앙대학교 부교수로, 1985년에서 1986년에는 중앙대학교 부설 동서문화연구소 예우작가로, 1996년에는 중앙대학교 대학원 대우교수로 지냈다. 전임교수가 되지 않은 것은 2차의 폐수술로 인해 정규강의를 못하고 1주 4시간만 강의를 하였기 때문이다. 구상은 프랑스 문인협회가 선정한 세계 제200대 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저술 및 작품]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의 동인지 시집 『응향(凝香)』에 「밤」, 「여명도(黎明圖)」, 「길」 등의 시를 발표하여 문단 데뷔하였다. 잡지 『백민(白民)』에 「발길에 채인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1947], 「유언」[1948], 「사랑을 지키리」[1949]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951년 시집 『具常』을 펴냈다.
1953년 시회평론집 『민주고발(民主告發)』, 1956 시집 『초토(焦土)의 시(詩)』, 1960년 수상집 『침언부어(沈言浮言)』, 1975년 『구상문학선(具常文學選)』, 1976년 수상집 『영원 속의 오늘』, 1977년 수필집 『우주인과 하모니카』, 1978년 신앙에세이 『그리스도 폴의 강(江)』, 1979년 묵상집 『나자렛 예수』를 펴냈다.
1980년 시집 『말씀의 실상(實相)』, 1981년 시집 『까마귀』, 시문집 『그분이 홀로서 가듯』, 1982년 수상집 『실존적 확신을 위하여』, 1984년 자전 시집 『과목(瓜木) 옹두리에도 사연이』, 시선집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1985년 수상집 『한 촛불이라도 켜는 것이』, 서간집 『딸 자명(滋明)에게 보낸 글발』, 『구상연작시집』을 펴냈다.
1986년 『구상시선집(具常詩全集)』, 수상집 『삶의 보람과 기쁨』, 파리에서 펴낸 불역(佛譯) 시집 『타버린 땅』 등이 있다. 1987년 『개똥밭』, 1988년 수상집 『시와 삶의 노트』, 시집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면』, 시론집 『현대시창작입문』, 이야기 시집 『저런 죽일 놈』, 1989년 런던에서 영역(英譯) 시집 『타버린 땅』, 시화집 『유치찬란』을 펴냈다.
1990년 한영대역(韓英對譯) 시집 『신령한 새싹』, 영역(英譯) 시화집 『유치 찬란』을 펴냈다. 1991년 런던에서 영역(英譯) 연작 시집 『밭과 강』, 시선집 『조화(造化) 속에서』, 1993년 자전(自傳) 시문집 『예술가의 삶』, 1994년 독역(獨譯) 시집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희곡 시나리오집 『황진이(黃眞伊)』, 1995년 수필집 『우리 삶, 마음의 눈이 떠야』를 펴냈다.
1996년 파리 라 디페랑스 출판사로부터 세계 명시선의 하나로 선정되어, 한불대역(韓佛對譯) 시집 『영원한 삶』을 펴냈다. 영국 옥스포드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한 『신성한 영감-예수의 삶을 그린 세계의 시』에 신앙시 4편이 수록되었다. 1998년 도쿄에서 일역(日譯) 한국 3인 시집 『구상·김남조·김광림』을 펴냈으며, 『인류의 맹점에서』를 출간했다. 2001년 『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를 펴냈다.
[상훈과 추모]
1955년에 금성화랑 무공훈장, 1957년에 서울시문화상, 1970년에 국민훈장 동백장, 1980년에 대한민국문학상 본상, 1993년에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수상하였고 2004년에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