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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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漆谷鹿峰精舍址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창평로3길 77-60[창평리 368]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장영복 |
건립 시기/일시 | 1561년 - 녹봉정사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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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3년 - 녹봉정사 보수 공사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09년 - 녹봉정사 화재 발생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1년 4월 18일 - 칠곡 녹봉정사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85호 지정 |
소재지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창평로3길 77-60[창평리 368] |
성격 | 터 |
지정 면적 | 2,557㎡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강학소 터.
[개설]
녹봉정사는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와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1517~1563]이 스승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가르침을 받들어 학문을 연구하고 풍속을 바로 잡는 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녹봉사(鹿峰寺) 터에 세운 강학소이다.
[변천]
원래 녹봉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사적(寺籍)을 보관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규모가 방대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숭유 배불(崇儒排佛) 정책에 의해 녹봉사는 폐허가 되어 내려오다가, 1561년(명종 16)에 성주 목사 황준량, 교수 덕계(德溪) 오건(吳健)이 중심이 되어 고을 사람들과 함께 녹봉사를 개축하고, 몇 채를 새로 지어 녹봉정사를 세웠다.
건물로는 성정당(誠正堂)·시습재(時習齋)·양정헌(養正軒)·양호루(養浩樓)·관물대(觀物臺)·천연지(天淵池) 등이 있었는데 모두 이황이 이름을 짓고, 손수 쓴 편액을 걸었다는 기록을 미루어 볼 때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녹봉정사 건립 후에도 스님 한 분이 조그마한 승사(僧舍)를 마련하여, 찾아오는 손님이나 유생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의 제자인 오건이 직접 훈도를 담당하고, 이황의 제자인 황준량이 지도 감독하여 녹봉정사를 운영하였다. 이후 성쇠를 거듭하여 19세기 초에 다시 전면적인 중수가 이루어졌고 강학소의 기능을 다시 회복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17년 산 약 18만 5000㎡의 세부 측량으로 이상호(李相虎) 외 10명이 연명으로 녹봉정사 소유 재산의 등기를 완료하였다. 1983년 녹봉정사 영모계에서 주관하여 모은 성금으로 보수 공사를 하였다.
[현황]
녹봉정사와 관련한 건물은 2009년 발생한 화재로 인해 붕괴되어 그 터만 남게 되었다. 역사적, 학문적으로 유서 깊은 녹봉정사를 복원하기 위하여 2011년 4월 18일 칠곡 녹봉정사지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85호로 지정됨에 따라 4억 5000만 원의 예산을 지원 받아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다. 지정 면적은 2,557㎡이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녹봉정사는 성주와 칠곡 지역의 학문적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여 성주를 중심으로 한 영남 남부 지역 성리학 강학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칠곡 녹봉정사지는 후일 ‘강안학파(江岸學派)’라고도 불리는 퇴계학과 남명학 양자를 계승한 새로운 성리학의 한 조류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산실로서의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