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A01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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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순하 |
매원마을에는 「대원군과 풍각댁 벼루사건」이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풍각댁이라 불리는 이동형은 가난한 선비로서, 대사헌을 지낸 이원록의 현손이다. 그가 곡식이 3천 석이 넘는 부자가 되기까지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동형은 책을 읽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소똥과 개똥을 주워 모았다. 그 거름이 산 무더기처럼 되던 어느 날 사람들이 찾아와 거름을 팔라 했지만, 그는 팔지 않고 계속 모으기만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거름이 탐이 나 서로 자기 토지를 줄 테니 농사를 지어 달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하여 모은 재산이 자기 땅만 밟고 한양을 갔다는 이야기이다.
벼루사건은 이동형의 자손인 이상림과 관련한 이야기이다. 당시 이상림의 집은 영남에서 수천 석의 부잣집으로 소문이 났는데, 사정이 그런지라 누구든 찾아오는 손님은 식사 대접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풍각댁의 예의범절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형편이 없었다고 한다.
이상림의 집에는 수대를 내려온 보물인 벼루가 있었는데, 이 벼루는 물 없이 편지 한 장을 쓸 수 있는 특이한 벼루였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대원군은 이상림의 매제인 풍양조씨가 승지로 있을 때 수차 그 벼루를 가져와 달라는 부탁을 전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였다.
1886년(고종 23) 9월 초순경 대원군은 과객 차림으로 직접 매원마을을 찾아왔다. 그러고는 이상림의 집 마루에 앉자마자 민비 욕을 했는데, 이상림은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같이 욕을 하고 말았다. 이상림의 외가는 하회 류성룡 대감의 종가집으로 외조부는 현감 류진익이며 외증조부는 병조판서를 지낸 류상조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평소처럼 말한 것이 화근이 되어, 그 후 15일쯤 지났을 무렵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이상림을 연행해 갔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1886년 10월 중순경 사랑채 기와지붕 위에 큰 구렁이가 나타나더니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리더라는 것이다. 이상림의 가족이 관으로부터 시신을 찾아가라는 전갈을 받고 한양 마포 지하형장에 갔는데,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형상의 시신 수백 구가 늘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상림의 가족은 그 많은 시신의 주머니를 일일이 뒤져서, 이상림이 평소 사용했던 부싯돌을 보고 시신을 찾은 뒤 고향으로 운구하여 지금의 왜관읍 금산리 선산에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그런데 장례식을 치르던 날 이상림의 매제인 조승지가 상여가 출발할 무렵 갑자기 식중독 증상으로 데굴데굴 뒹구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가 쉬게 하였는데, 집으로 돌아온 조승지는 벽장문을 열고 벼루를 숨겨 훗날 대원군에게 상납을 함으로써 높은 벼슬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단다. 당시 이상림의 거대하고 웅장한 한옥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뜯겨 나가는 수몰을 당했으며, 가세는 풍비박산이 되어 몰락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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