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C01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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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남원리 남창마을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최엄윤 |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가산 지역은 영남 내륙의 주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었다. 이에 1639년(인조 17) 관찰사 이명웅의 요청으로 내성이 축성되기 시작하여 1700년(숙종 26)에는 외성이 완성되고, 1741년(영조 17년) 관찰사 정익하의 요청으로 중성이 완공되었다.
이렇듯 가산산성은 무려 100여 년에 걸쳐 축조된 산성으로, 1971년 3월 26일 사적 제216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가산산성은 관방의 요새로서 훌륭한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우선 산성의 형태가 밑은 불룩하고 주둥이 부분은 아주 좁은 형태의 호리병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평평한 땅을 골라 성내로 넣고 경사가 심한 경계선을 골라 성벽을 쌓았기 때문이다. 산성 내에는 군관청, 군기고, 보루(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은 구조물), 포루(아군의 대포 사격을 유리하게 하기 위하여 쌓은 구조물), 장대(전투가 벌어질 때 성내의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대장이 자리하는 곳) 등 군사용 진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1954년의 집중 폭우와 산사태 이전까지 남원2리는 원래 가산산성 진남문 안에 위치했던 마을로서, 군량과 군사 무기를 보관하던 남창(南倉)이 있었다고 해서 ‘남창마을’이라 불렸다.
남창은 외성 축조 시 만들어진 창고로, 1954년 집중호우로 발생한 산사태로 인해 그 흔적마저 사라졌다. 현재 옛 남창마을 일대에는 해원정사만이 남아서 예전의 마을 모습을 전혀 상상할 수 없다. 그나마 『칠곡부읍지(漆谷府邑誌)』에 남창에 보관했던 물목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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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산성 진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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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정사
옛 남창마을은 외성 진남문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진남문은 가산산성 남문의 다른 이름으로 마을 사람들에게는 더욱 친숙하게 불리는 이름이다. 가산산성 남문은 1700년(숙종 26) 관찰사 이세재에 의해 축성된 외성의 정문인 동시에 내성과 외성 전체의 정문이기도 하다. 이 진남문이 곧 옛 남창마을의 대문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원래 진남문은 홍예문이었으나 1954년 폭우로 반파되었다. 그 후 1977년부터 1980년까지 3년에 걸쳐 총 1억 7천여만 원을 투입하여 외성을 복원·중수하였지만 옛 모습은 많이 사라져 버렸다.
진남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현재에도 문고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양측 벽면에 작은 네모 모양으로 움푹하게 파인 곳이 있는데 그곳에 문고리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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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구 전 가산산성 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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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 복구작업
예부터 남창마을 사람들은 진남문을 지키며, 행여 다른 동네에서 죽은 사람이 진남문을 통과해 산에 묘를 쓰려 하면 문을 잠가 출입을 통제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남창마을 사람들이 죽었을 때도 진남문을 통과하여 성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고 한다. 죽은 사람들을 실고 다니기 위해서는 남문의 동쪽 80m 지점에 있는 작은 시문(尸門)으로 다녔어야 했다. 오늘 가산산성을 오르내리며 진남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이 문은 그저 외성에 난 산성 입구 정도로만 인식될지 모르나, 반세기 전만 해도 행여 부정한 기운이 마을에 들어오지 않을까 지성으로 마을을 지켰던 마을살이의 중심이기도 했던 문이다. 진남문에는 ‘진남문’이라는 현판과 함께 주변 평평한 땅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