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C03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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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남원리 남창마을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최엄윤 |
만약 남창마을에 사공태 옹이 안 계셨다면 우리는 그처럼 풍요로운 남창마을 이야기를 어디에서 전해들을 수 있었을까? 살아 있는 남창마을 생활박물관처럼 어르신의 유년기와 청년기의 하루하루에는 남창마을 역사가 오롯이 녹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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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태 옹
2009년 77세가 되시는 사공태 옹은 요즘도 1년에 다섯 번은 가산산성을 오르실 만큼 건강하시다. 또한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총총한 기억력과 듣는 이의 귀가 즐거워지는 입담으로 마을 해설사의 역할도 하고 계신다.
사공태 옹은 자신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가리켜 ‘만년 2학년’이라고 우스갯소리처럼 말씀하신단다. 여덟 살 땐가 기성1리에 있던 기남간이학교[현 동명동부초등학교]를 다녔던 어르신은 가난으로 인하여 2학년을 다니다 그만두고 1943년 재입학을 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결국 2학년 때 그만두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다시 학교를 다녔지만 또 전쟁이 발발해서 2학년을 다니다 중퇴하였다. 아마 한국전쟁이 끝나고 학교를 갔어도 수해가 나서 다시 2학년을 중퇴했을 거라면서 어르신은 그래서 스스로를 ‘만년 2학년’이라 부른다며 소탈하게 웃으셨다.
사공태 옹은 남창마을 동변마을에서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당시 서변마을에 살던 지금 부인인 할머니와 결혼하였다.
한 마을에서 결혼을 하려면 3대가 정성을 들여야 한다고 했던 옛 말도 있는데, 이는 옛 농촌마을이 이웃집 숟가락 숫자까지 다 알 만큼 속속들이 이웃 간 사정을 다 알기에 몇 대에 걸쳐 책잡히는 흉이 없어야 한 마을 결혼이 가능했으리라는 뜻이리라. 할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가 큰집이 있던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말이 귀하던 시절이어서 할아버지는 가마를 타고 장가를 갔다. “신랑이 가마 타고 먼저 가면 가가지고 하루 처갓집에…… 사모관대 쓰고 바라고 있는 거지. 가마는 삽적거리(대문 앞)에 바라고 섰으면…… 그래 가면 서동 부서 카면서, 신랑은 서쪽, 신부는 동쪽 그래 서면은 북쪽에 임금이 있어 임금한테 절 두 번 하면 술 먹고, 암탉은 상 위에 가운데 있고…… (중략) 본대 3일 만에 와야 되는데 한 마을에서 오니께 가마 타고 왔어, 신부도 가마 타고 우리 집에 왔다가 밤 되면 집에 다부 들어가, 그래야 3일이 되지. 와 가지고 저녁 되면 걸어서 가고, 가마는 한 번씩 타 봤으니 됐고, 허허…….”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사공태 옹은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그리고 1954년 집중 폭우까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은 세대이다.
1945년 해방 당시 열세 살이던 옹의 기억 속 일제의 억압은 참으로 모질었다. “전쟁할라고 우리나라 사람들, 그 당시 얼마나 압박을 받았습니까? 우리 엄마, 아부지 콩밭 메다가 몽둥이로 얼마나 두두려 맞았는지, 목화 안 심구고 콩 심궜다고…….”
특히 사공태 옹은 당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을 피해 급하게 언청이에게 시집을 갔던 누이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픈 가슴을 감추지 못한다. “참 마실에서 인물 제일 좋다고, 인물 참 좋다고 소문났는데 거다 치워 버렸는데. 요새 같으면 맞선 보잖아, 데이트도 하고. 그적에는 부모들이 가가 보고 됐다 이카면 해야지…… (중략) 날 받아 가지고 하는데 그래가 보니 양쪽에 쭉 찢어져가 요새 같으면 사기죄로 못한다 하는데 할 수 없어가. 참 인물도 잘나고 활발하고 했는데 꼼짝없이 같다 아닌교, 그래가 살다 보니 나이 어리지, 그래가 도망 온 기라, 나 몬 살겠다 카믄서. 그러니 우리 아버지 성질이 요새는 그러커든, 옛날에는 안 그랬슴더. 죽어도 거기서 죽고 살아도 거서 살아라, 우리 집에 니 필요없다 캐가지고. 우리 옛날 어른 성질 그래가지고 눕혀 가지고 머리를 주 뽑는 거야…….”
그 곱던 누이도 몇 해 전 세상을 떴단다. 누이 생각에 어르신의 목소리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한국전쟁 당시, 당신이 장가가던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인기 많던 당시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이야기 해 주신다. “내가 한마을에서 결혼을 했는데 그 이전 전부 마을에 아가씨들이라. 총각들은, 남자들은 군대 다 가버리고 조삼덕이라는 사람하고 나하고 둘이 스물한 살까지 여기 있었으니깐 처자가 흔한 기라. 마을에…… (중략) 예전에는 먹을 게 없었는데 천지라 먹을기, 전부 사줘~ 총각들이 어찌나 그리분지…… 허허허.”
한국전쟁으로 남자가 귀하던 시절, 어르신은 현재는 고인이 되신 조삼덕이라는 분의 3형제와 함께 국군의 보급대 역할을 했다고 한다. 가산산성 내에 보국사라는 절이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인민군도 오고 국군도 왔었다고. 당시 37명의 국군 밥을 해다가 매일 지고 날랐는데 군인들의 살상과 횡포가 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동네 지도자 감투도 맡아 놓고 다 써봤단다. “전두환 정권 때 정화위원장, 노태우 정권 때는 바르게살기위원장 내가 다했어요. (중략) 나이도 한 50대까지는 어디서 오란 데는 많았는데 60대가 넘어가니깐 오라카는 데가 없어요. 경로당이나 오라카고, 회장해라 뭐해라, 오라카는 데는 한 군데데 경로당, 이제 염라대왕 오라 카면 가야 된다. 인제 나이 70 넘어 80 넘어다 보면 할마시한테도 지고, 젊은 아덜한테도 지고…….” 여전히 소탈하게 웃으시는 어르신의 농담 같은 넋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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