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D01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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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3·4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순하 |
낙화담(落花潭) 과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는 웃갓마을뿐 아니라 칠곡군의 여러 지역에서 비슷한 내용으로 회자되고 있다. 낙화담이 있던 곳은 웃갓마을 뒤편 암석으로 된 산 아래로, 이 산은 산세가 바라[鉢]처럼 생겼다고 해서 발암산(鉢巖山) 혹은 바래덤으로 불린다.
낙화담과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는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되는데, 세부적인 면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넓은 의미에서는 이야기가 모두 동일하다.
그 중의 한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임진왜란 당시 마을의 여인들이 왜적을 피해 발암산으로 도망갔다가 왜병에게 발각되자,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버릴지언정 왜병의 손에 더렵혀지지 않겠다며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훗날 이를 전해들은 사람들이, 여인들이 아름다운 꽃처럼 떨어져 내린 못이라 해서 낙화담이라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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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암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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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암산과 지천저수지
『(국역)칠곡지』에는, 임진왜란 당시 한 마을의 선비와 부녀자들이 푸른 옷 붉은 치마를 입고 왜적을 피해 발암에 올라갔다가, 왜적에게 핍박을 받게 되자 모두 물에 몸을 던져 세상을 떠나므로, 그 떨어져 죽은 못을 후인들이 낙화담이라 불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마지막 낙화담의 전설은 웃갓마을에 거주했던 강씨 집안사람들과 연관이 있는 내용이다. 임진왜란 전 웃갓마을에 살던 강씨 집안에 5형제가 살았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해 인(인장)을 받은데다 집 안에 바위가 다섯이나 있다고 하여 이들을 일러 오인석강씨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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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석바위
당시 웃갓마을에 살던 광주이씨 조상 중에 석담이란 분이 계셨는데, 24세의 나이로 진사를 지내셨다. 석담 선생이 마침 대구 방면으로 여행을 나섰다가 오는 길에 왜병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부지런히 웃갓마을로 돌아오다 마을 입구에서 강씨네 집 여자종이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석담 선생은 종에게, 빨리 집으로 가서 왜병이 쳐들어온다고 고하라고 했다. 여자종이 빨래하는 것을 멈추고 집에 가서 이를 알리자, 마침 바둑을 두고 있던 집안어른들이 그 말을 듣고, “이 진사 같으신 분도 그런 허황된 소리를 하는가?” 하면서 바둑을 계속 두려 하였다. 그러자 그 중 한 노인이 “이 진사가 그런 허황된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다.”고 하여 젊은이 하나를 불러 동구 밖으로 가 직접 확인하게 하니, 과연 왜병이 떼를 지어 쳐들어오고 있었다.
오인석강씨 집안사람들은 갑자기 변을 다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하다가 모두 발암산으로 올라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피난을 했으므로 얼마 후 왜병이 동네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텅 비고 난 후였다. 발암산에 올라간 동민들은 왜병이 마을을 점령하자 돌을 굴리고 함성을 지르며 세를 과시했다. 왜병들이 동민들을 죽이기 위해 발암산으로 올라가려 했으나 산 아래는 깊은 강이 있고 위쪽에서는 커다란 돌들이 계속 굴러 내려와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세를 자세히 살피니 신동 옆으로 비스듬한 경사로가 있으므로, 모두 그곳으로 해서 발암산을 올라갔다.
왜병에게 포위된 동민들은 왜병의 손에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버리자면서 모두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그 때 죽은 사람이 대부분 부녀자였으므로 이 바위 절벽을 낙화암이라 했다는데, 그 일로 강씨 집안은 전멸했으나 다행히 석담 선생은 골짜기로 피난을 하여 살았다고 한다. 석담 선생은 그 후 팔공산으로 가서 공부를 열심히 하여 학문으로 이름이 높아 벼슬을 겸비했으며, 훗날 고향으로 돌아와 발암산 아래에 사양서원을 세워 그 덕을 기리고 후진을 양성했다고 한다.
낙화담은 1960년대 만들어진 지천저수지에 포함되어 현재는 그 모습을 찾기 어려운데, 10여 년 전 지천면청년회에서 세운 낙화담비가 이 모든 사연을 안은 채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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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담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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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담 비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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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암산 기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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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목댁 할머니 사진-양목댁 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옛날 발암산 사진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