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7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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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基卨 |
영어음역 | Yi Giseol |
이칭/별칭 | 공조(公造),연봉(蓮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제규 |
[정의]
조선 후기 청풍 군수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조(公造), 호는 연봉(蓮峯). 증조할아버지는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이계장(李繼長)이고, 할아버지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이언침(李彥忱)이며, 아버지는 영응선생(永膺先生) 이지남(李至男)이다. 어머니는 승지 정원(鄭源)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기설(李基卨)[1556~1622]은 박지화(朴枝華)[1513~1592]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86년(선조 19) 효행과 순덕(純德)으로 주부(主簿)에 발탁되었고, 이듬해 청산 현감(靑山縣監), 1592년(선조 25)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의 도감 낭청(都監郞廳)을 겸하였으며, 해주에 있던 행재소(行在所)에 갔다가 그해 겨울 왕과 함께 환도하면서 군향(軍餉) 수급의 책임을 지고, 또한 비변사 낭청까지 겸하여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1596년(선조 29) 청풍 군수에 제수되었고, 1599년(선조 32) 상원 군수(祥原郡守) 그리고 이듬해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었다. 1605년(선조 38) 사도시 정(司䆃寺正)이 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이천 부사·예빈시 부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610년(광해군 2) 부호군 제수도 거절하였다. 이후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서인(庶人)으로 쫓겨나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시국을 개탄하며 끝내 벼슬을 사양하였다. 서울 삼청동 백련봉(白蓮峯) 아래 연봉정(蓮峯亭)을 짓고 학문에 전심하여 경사·천문·지리·율학·병술 등 여러 방면에 정통하였다.
권필(權韠)[1569~1612]의 『석주집(石洲集)』 별집 제1권에 수록된 칠언절구(七言絶句)의 시 「오봉(五峯)의 시에 차운하여 이 청풍(李淸風)의 유거(幽居)에 제하다」에는 이기설이 머물렀던 공간을 ‘이 청풍의 유거’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이기설이 청풍 군수 시절을 소중히 여겨 연봉이라는 호 외에 청풍이라는 용어도 즐겨 사용하였던 사실을 보여 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연봉집(蓮峯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마지리에 있다. 1668년(현종 9) 세워진 높이 118㎝, 너비 51㎝, 두께 18㎝ 크기의 묘갈(墓碣)이 있으며, 조경(趙絅)이 글을 짓고 이의덕(李義悳)이 글씨를 썼다. 비문은 조경의 문집인 『용주집(龍洲集)』에도 기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623년(광해군 15) 정경세(鄭經世)[1563~1633]의 건의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1633년(인조 11) 인조의 특명으로 정려(旌閭)와 함께 효자삼세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청풍 군수로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