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1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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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泰植 |
영어음역 | Sin Taesik |
이칭/별칭 | 열경(悅卿),도암(島菴)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완회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12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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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시기/일시 | 1864년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몰년 시기/일시 | 1932년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이강년 의진 소모후군장 |
[정의]
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가계]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열경(悅卿), 호는 도암(島菴).
[활동 사항]
신태식(申泰植)[1864~1932]은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내부 주사(內部主事)와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역임하였다. 단발령이 내려질 때 문경의 농암 장터에서 일본군 밀정을 총살하면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1896년(고종 33) 아관 파천 이후 고종이 의병을 해산하라는 조칙을 내리자 해산하였다. 이후 향리에 은거하다가, 1907년(순종 1) 여름 군대 해산과 고종의 강제 퇴위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킨 이인영(李麟榮)의 격문을 받고 봉기하였다.
단양에서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한 뒤 소백산 일대를 비롯하여 울진, 평해, 영양, 영월, 산동, 제천, 원주, 홍천, 춘천, 철원 등지에서 항쟁하였다. 그의 휘하 장졸로는 도선봉(都先鋒) 전세영(全世榮), 좌선봉 강창근(姜昌根), 중군 유제칠(柳齊七), 참모 엄해윤(嚴海潤), 영솔(領率) 조수안(趙守安), 별포(別砲) 김운선(金雲先) 등이 있었다.
신태식은 이강년(李康秊) 부대와 합진하여 소모후군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1907년 말에는 부상을 입고 부대를 이강년에게 맡겼었다. 가평 부근에 주둔하면서 그해 겨울을 넘겼는데, 이듬해 봄에 포천 수비대와 싸웠으나 패하고 영평(永平) 이동(裡洞)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1909년(순종 3) 1월 경성 감옥에 수감되어 그해 4월 20일 경성 공소심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영해 면민들이 입석송덕(立石頌德)하였던 사실을 들어 진정하여 10년 형으로 감형되었다. 1918년에 출옥하였다.
이후 3·1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경상도 방면에서 조선 독립 후원 의용단을 조직하고 김찬규(金燦圭)·이응수(李應洙)·김돈희(金敦熙)·김동진(金東鎭) 등과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기밀이 누설되어 그 이듬해 가을에 붙잡혔다. 1922년 12월 28일 대구 감옥에 재수감되어 다음 해 12월에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24년 출옥하였다. 출옥한 이후에도 일제에 대한 저항을 그치지 않고 활동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