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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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공식명칭 | The Period of Goryeo Dynas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고려 |
집필자 | 배재홍 |
[정의]
고려 왕조가 지속되던 시기의 삼척 지역 역사와 문화.
[개설]
757년부터 삼척군으로 존재해 오던 삼척 지역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995년 척주로 명칭이 개칭되고 읍격이 군에서 주로 승격되었다가 1018년 삼척현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인 1376년에 다시 삼척군으로 승격되었다.
[척주 설치와 그 운용]
고려 태조 왕건은 개국과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지방 세력의 향배와 연결하여 군(郡)·현(縣)을 개편하였다. 즉 고려의 개국과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자신에게 귀부·협조한 지방 세력 출신지는 주·부로 승격시켜 주고, 반면에 불복한 지역이나 비협조한 지역은 읍격을 강등시켰다. 그러나 고려는 940년(태조 23)에 그동안 통일 전쟁을 치르면서 수시로 단행한 군·현 개편을 종합 정리하는 등 제도를 정비하였다. 당시 군·현 개편은 신라의 지방 제도를 기본으로 하였다. 개편 대상이 된 군·현은 150여 곳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태조 대의 군·현 개편 대상에서 삼척 지역은 제외되었다. 이에 따라서 삼척 지역은 고려에 들어와서도 읍격이나 구역의 변동 없이 여전히 삼척군(三陟郡)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그 후 995년(성종 14)에 지방 제도를 대개편할 때 삼척군은 읍명 개정과 읍격 조정이 이루어졌다. 즉 읍격이 지금까지의 군에서 주(州)로 승격되었고, 이에 따라서 읍명도 그때까지의 삼척에서 척주(陟州)로 개칭되었다. 이와 함께 척주로 승격되면서 단련사(團練使)가 지방관으로 파견되었다. 이처럼 읍격이 군에서 주로 승격된 것은 성종이 주현제를 실시하면서 군 단위 행정 구역을 없애기 위하여 군·현 단위의 읍 가운데 필요한 곳을 주로 승격시켰기 때문이었다. 당시 척주는 10도 가운데 삭방도(朔方道) 소속이었다. 그러나 성종 대의 지방 제도 개혁은 얼마가지 않아 흐지부지되었다. 이에 따라 곧바로 부(府)와 군의 읍호가 부활하고, 1005년(목종 8)에는 관찰사·도단련사·단련사 등 외관(外官)이 폐지되었다. 한편 단련사가 폐지될 때 척주 단련사도 함께 폐지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단련사 폐지 후 어떤 외관으로 대체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삼척현 설치와 그 운용]
1018년(현종 9)에 지방 조직을 군정 성격에서 민정 성격으로 개혁할 때 척주는 읍명이 다시 삼척으로 환원되고, 읍격은 주에서 현으로 강등되었다. 이처럼 삼척현(三陟縣)으로 강등됨으로써 이후 지방관도 현령(縣令)이 파견되었다. 이와 함께 지금까지 삼척 관할이던 우계현(羽溪縣)은 떨어져 나가서 명주로 이속되었다. 삼척현은 이후 동계(東界)에 소속되어 안변도호부 병마사의 관할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양계(兩界)에는 병마사와 주·진(鎭)을 잇는 중간 기구로서 분도제(分道制)가 실시되었음을 감안하면 삼척현령은 안변도호부 병마사뿐만 아니라 감창사(監倉使), 분도장군(分道將軍), 분대(分臺) 등의 통솔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변경 지역인 동계의 외관에는 군사 성격이 짙은 방어사(防禦使), 진사(鎭使), 진장(鎭將) 등을 파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럼에도 동계 소속인 삼척 지역에 현을 두고 민사 성격의 현령이 파견된 것은 삼척 지역이 변경 지대와 거리가 멀리 떨어진 후방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삼척현에는 또 7품 직위의 장관인 현령 이외에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으로 8품인 현위(縣尉)가 한 명 더 있어 현령을 행정 측면에서 보좌하였다. 또 비록 관인은 아니지만 현사(縣司)를 구성하여 현령을 보좌하면서 경내 말단 행정 실무를 공식 담당하는 향리층도 있었다. 이와 함께 삼척현을 구성하는 기초 행정 단위인 촌(村)에는 자연촌과 지역촌이라고도 하는 행정촌이 있었다. 행정촌은 자연촌 몇 개를 인위로 편제하여 구성되었다. 행정촌에는 책임자로 촌장(村長)·촌정(村正) 등이 있어서 현령은 이들을 통하여 촌락을 지배하였다.
이 후 삼척현은 소속 관계에만 변동이 있었을 뿐 14세기 중엽까지 별다른 개편 없이 이 상태가 지속되었다. 삼척현은 동계 소속이었다. 그러나 몽골 침입으로 동계가 사실상 해체되어 가자 1309년(충선왕 1) 명주에 강릉도(江陵道)가 신설되었다. 이때부터 삼척현은 강릉도 소속이 되었다.
[안집중랑장 파견]
14세기 후반, 즉 공민왕 말엽과 우왕 초반에 삼척현에는 현령 대신 안집중랑장(安集中郎將)이 잠시 파견되기도 하였다. 당시 삼척현에 파견된 안집중랑장은 모두 세 명이었다. 안집중랑장은 공식 지방관으로 보기는 어렵다. 어디까지나 안집사(安集使)의 임무를 띠고 파견된 임시 관리로 보면 된다. 당시 동해안에 빈번하게 출몰한 왜구의 침입 때문에 임시로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삼척군 설치]
삼척현은 1376년(우왕 2)에 다시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고 지방관도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게 되었다. 이때의 읍격 승격은 당시 왜구의 빈번한 동해안 침입으로 말미암아 삼척 지역 군사력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 때문에 1384년(우왕 10)에는 삼척포진에 처음으로 만호(萬戶)를 두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