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2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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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蔚珍三陟地區武裝共匪浸透事件 |
영어공식명칭 | The Armament Red Guerrillas Infiltration Event in Uljin and Samcheok Reg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흥술 |
[정의]
1968년 11월 120명의 북한 무장 공비가 유격대 활동 거점 구축을 목적으로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한 사건.
[개설]
1968년 10월 30일부터 경상북도 울진과 강원도 삼척 지역에 침투한 무장 공비 소탕을 위해 울진을 비롯한 봉화와 강원도 삼척·명주·정선 등 지역에서 실시된 ‘대간첩 작전’이 종료되는 12월 말까지 57일 동안 북한 무장 공비 소탕 작전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군인, 경찰 등 수십 명이 희생되었다.
[역사적 배경]
1968년 전후 미국은 베트남 폭격을 중지하는 동시에 파리평화협정을 진전시킴으로써 베트남 전쟁을 마무리해 가고 있었다. 동서 대결 분위기가 완화되어 가던 추세 속에서 북한은 중공과 소련의 군사 원조를 지속 확보하기 위하여 한반도 긴장 상태를 다시 한 번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경과]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 밤에 북한 유격대가 남한에 활동 거점을 구축하기 위하여 경상북도 울진과 강원도 삼척으로 침투하였다. 이 무장 유격대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예하의 124군 소속으로, 같은 해 1월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하여 남파시킨 무장 공비들과 같은 부대였다. 나중에 생포된 무장 공비의 증언에 따르면 1968년 7월부터 3개월 동안 유격 훈련을 받고 10월 30일 오후 원산에서 배로 출발하여 그날로 울진 해안에 도착하였다.
북한이 무장 공비를 투입한 것은 1·21사태 이후의 대남 공작 실패를 만회하고 남한에서의 민중 봉기를 유도하기 위한 거점 마련에 있었다. 나아가 미국의 월맹[북베트남]에 대한 북폭 중지와 월남전 종식에 초조한 나머지 한반도에서의 긴장 조성을 통한 중국·소련으로부터의 군사 원조 획득과 정치 대위기 은폐 의도에서 감행되었다.
무장 공비들은 15명씩 8개 조로 편성되어 10월 30일, 11월 1일, 11월 2일의 사흘에 걸쳐 야음을 틈타 경상북도 울진군고포 해안에 상륙한 뒤 울진을 거쳐 봉화를 지나 강원도 삼척·명주·정선 등지로 침투하였다. 무장 공비들은 군복·신사복·노동복 등 갖가지 옷차림에다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채 주민들을 집합시켜서 북한 책자를 배포하고 북한의 발전상을 선전하는 한편 정치사상 교육을 시키면서 ‘인민유격대’ 가입을 강요하였다.
삼척군 하장면의 한 산간 마을에서는 80세 노인, 52세 며느리, 15세 손자 등 일가 세 사람이 난자당하였다. 평창군 산간 마을에서는 10세의 이승복(李承福)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절규와 함께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다. 울진, 정선 등지에서도 주민 학살이 저질러졌다.
이런 위협 속에서도 주민들의 신고를 받은 당국은 11월 3일 오후 2시 30분을 기하여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 ‘을종사태’를 선포하고 대간첩 대책본부의 지휘 아래 군과 향토예비군을 출동시켜 소탕전을 벌였다.
[결과]
11월 30일까지 공비 소탕전을 벌인 결과 기관단총 56정, 권총 8정, 실탄 1만 8000발, TNT 17발, 수류탄 163발, 카메라 3대 등을 노획하였다. 12월 말까지 58일의 작전 기간에 무장 공비 120명 가운데 111명을 사살하고 5명은 생포, 2명은 자수, 2명은 도주하였다. 11월 29일 대간첩 대책 본부의 발표에 따르면 군경 27명, 예비군 6명이 전사하였다. 또 무장 공비에게 살해된 민간인 16명을 포함하여 모두 49명이 목숨을 잃고, 37명이 부상하였다.
[의의와 평가]
북한의 대남 교란 행위는 한국 국민들의 반공 태세를 한층 공고히 다지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국제연합[유엔]은 평화통일 노력 방해 행위에 대한 특별 보고를 결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