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3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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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陟召公臺碑 |
영어공식명칭 | Sogongdae Stele of Samcheo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노곡리 산67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도현 |
건립 시기/일시 | 1516년(중종 11) - 삼척소공대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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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복원 시기/일시 | 1578년(선조 11) - 삼척소공대비 다시 세움 |
보수|복원 시기/일시 | 1991년 - 삼척소공대비 보수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363년(공민왕 12) - 황희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452년(문종 2) - 황희 사망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6년 5월 23일 - 삼척소공대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7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삼척소공대비 강원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현 소재지 | 삼척소공대비 -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노곡리 산 67 |
성격 | 공덕비 |
관련 인물 | 황희 |
관리자 | 삼척시 |
문화재 지정번호 | 강원도 문화재자료 |
[정의]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노곡리 산67에 있는 비.
[개설]
강원도 삼척시 임원리에서 원덕읍을 오가는 와현 정상에 1423년 관동 지방 흉년 극복에 큰 공을 세운 황희를 기리기 위하여 삼척 지역 주민들이 세운 소공대가 후대에 와서 무너진 것을 황희의 후손 황맹헌이 비석 형태로 세운 것이 삼척소공대비이다. 1516년(중종 11) 황희의 4대손 황맹헌이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소공대를 둘러보고 소공대가 와해되어 있자 그 자리에 소공대비를 세웠다. 그리고 1578년(선조 11) 황희의 6대손 황정식이 삼척부사로 부임하여 풍우로 마모된 비를 다시 세웠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 남곤이 지었다.
현재 삼척소공대비가 세워져 있는 비각은 1988년에 중건된 것이다. 그러나 1990년 태풍으로 비각이 무너지고, 비석의 상단 부분이 완전히 부러졌다. 이듬해인 1991년 문화재 연구소가 부러진 비체(碑體)를 접착시킴으로써 비석을 원상 복구하였다. 그리고 삼척군의 지원으로 비각을 다시 세운 후 1994년에 장헌경이 글을 짓고 일죽(一竹)홍태의가 서각한 소공대비각중건기를 걸었다.
[건립 경위]
1423년(세종 5) 관동 지방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관찰사로 임명된 황희의 구호책에 힘입어 서민들은 재앙을 면할 수 있었다. 이에 백성들은 황희의 치적을 기리기 위하여 황희가 쉰 와현에다 황희를 소공에 비유한 소공대를 쌓았다.
[위치]
삼척소공대비는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노곡리 산67에 위치한다.
[형태]
비석은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삼척소공대비는 뚜껑돌[개석(蓋石)] 없이 비신과 비좌만으로 만들었다. 비의 윗부분을 둥글게 처리한 원수(圓首)와 사각형[방형(方形)]의 비신 받침인 방부(方趺)를 갖추고 있다.
[금석문]
소공대비 병서(召公臺碑 幷序)
삼척치지남칠십리유와현현상유석○왈소공대개석황익성주절지소야영락계묘관동기익성특응간기래무기민갈심진활민무손척상가지사일품복판우군부사공기환조민모공덕이불감망칙상여취공소게지지루석위대이우감당지사시이세적만초한연대장이위평지의세기해금감사장원공장절래○익성지사대손야범발정무민일수가법일일안부등소위와현지강배회대하차모차비○연여문경○○취석수기○○이거복문이탄왈익성좌세종치태평기유애일도특서여이대지성훼하여공호연공거백년이공덕지재인여일일개금지생치개공석일근구전활지민지자손야기조선소축지대상귀연로방이공지후예우래무기자손사수기구자기익성지소증료자우기민지소감기자호무비천소이후보익성이상기민추모불이지성심야시불의무지익성휘희사업성명구재국승장원명맹헌노경기자운명왈명주남반실직구강유대임로경시망망문석익성덕류소공포기욱한혜류관동대우현상왈공소사망모체○우대지하성상환역공거대존수래사지공자유손민○상고식아익성신대언건독비정덕지재인여대구신전사정석이조천춘영상남곤찬정덕십일년병자오월립후육십일년정축동위풍도절익세무인익성공육대손정식적위부사감모중건(득석사직역전련조이립)잉사여필지시만력육년팔월야지정외손봉헌대부려성군송인서(三陟治之南七十里有瓦峴峴上有石○曰召公臺盖昔黃翼成駐節之所也永樂癸卯關東饑翼成特膺簡寄來撫其民竭心賑活民無損瘠上嘉之賜一品服判右軍府事公旣還朝民慕公德而不敢忘則相與就公所憩之地累石爲臺以寓甘棠之思時移歲積蔓草寒烟臺將夷爲平地矣歲己亥今監司長原公杖節來○翼成之四代孫也凡發政撫民一守家法一日按部登所謂瓦峴之岡徘徊臺下且慕且悲○然如聞磬○○聚石修其○○而去僕聞而歎曰翼成佐世宗致太平其遺愛一道特緖餘耳臺之成毁何與公乎然公去百年而公德之在人如一日盖今之生齒皆公昔日勤劬全活之民之子孫也其祖先所築之臺尙歸然路傍而公之後裔又來撫其子孫使修其舊玆豈翼成之所曾料者又豈民之所敢冀者乎無非天所以厚報翼成以償其民追慕不已之誠心也是不宜無誌翼成諱喜事業聲名俱載國乘長原名孟獻魯卿其字云銘曰溟州南畔悉直舊疆有臺臨路經始茫茫聞昔翼成德類召公飽饑燠寒惠留關東臺于峴上曰公所舍望慕涕○于臺之下星霜換易公去臺存誰來嗣之公自有孫民○相告寔我翼成新臺偃蹇督匪程德之在人與臺俱新鐫詞貞石以詔千春領相南袞撰正德十一年丙子五月立后六十一年丁丑冬爲風倒折翌歲戊寅翼成公六代孫廷式適爲府使感慕重建(得石史直驛前鍊造而立)仍使余筆之是萬曆六年八月也止亭外孫奉憲大夫礪城君宋寅書)
[현황]
현재 삼척소공대비가 세워진 비각 안에 1994년에 게판(揭板)한 소공대비각중건기(召公臺碑閣重建記)에는 소공대비에 실려 있는 내용, 원덕 지역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삼척소공대비를 문화재로 지정하게 된 과정과 비각의 중수 과정 등이 쓰여져 있는 등 그 현황을 잘 보여 준다.
召公臺碑閣重建記(소공대비각중건기)
공(公)의 휘(諱)는 희(喜), 자(字)는 구부(瞿夫), 호(號)는 방촌(厖村), 시호(諡號)는 익성(翼成), 본관(本貫)은 장수(長水) 판강릉부사(判江陵府使) 군서(君瑞)의 아들로 송경(松京)[개성(開城)]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出生)하여 평소(平素)에 관후인자(寬厚仁慈)하고 청백(淸白)한 관헌생활(官憲生活)로 청백리(淸白吏)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세종(世宗) 오년(五年) 계묘(癸卯)[1423] 관동(關東) 일대(一帶)에 대기근(大饑饉)이 들어 황익성공(黃翼成公)[황희정승(黃喜政丞)]이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의 중임(重任)을 맡고 오셔서 백성(百姓)을 정성(精誠)껏 무휼(撫恤)하며 구제(救濟)하니 한 사람의 아사자(餓死者)도 없었다. 임금께서 이를 가상(嘉賞)하여 일품조복(一品朝服)을 하사(下賜)하시고 판우군부사(判右軍府使)로 제수(除授)하였다.
공(公)은 이미 조정(朝廷)에 돌아갔으나 백성(百姓)들은 공(公)의 은덕(恩德)을 잊지 못하여 고개 위에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소공대(召公臺)라 일컬었다. 이곳이 삼척부(三陟府) 남칠십리(南七十里)에 있는 와현(瓦峴)이요, 공(公)이 쉰 곳이다.
성종(成宗) 십년(十年) 기해(己亥)[1479]에 공(公)의 사대손(四代孫) 장원(長源)이 감사(監司)로 도임(到任)하니 지금(至今) 백성(百姓)들은 예전에 공(公)의 혜택(惠澤)을 받은 자손(子孫)들로서 선조(先祖)에 대(對)한 추모(追慕)의 감회(感懷)가 無量(무량)하여 대(臺)를 보수(補修)하였고,
중종(中宗) 십일년(十一年) 병자(丙子)[1516]에 영의정(領議政) 남곤(南袞)이 찬(撰)하여 장원(長原) 감사(監司)가 비(碑)를 세웠으나 정축년(丁丑年)[1578] 겨울에 의풍도절(依風倒折)되었다. 이듬해 선조(宣朝) 십일년(十一年) 무인(戊寅) 육월(六月) 팔일(八日) 공(公)의 육대손(六代孫) 정식(庭式)이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부임(赴任)하여 지정(止亭) 외손(外孫) 봉헌대부(奉憲大夫)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 지은 글로 비(碑)를 중건(重建)하였다. 오랜 세월(歲月)에 비(碑)가 마멸훼손(磨滅毁損)되어 귀중(貴重)한 고적(古跡)이 실적(失跡)될까 걱정되어 비(碑) 보존관리(保存管理)의 중요성(重要性)을 인식(認識)하고 유림대표(儒林代表) 이혁재(李赫在) 김택진(金澤振) 장헌경(張憲敬) 등이 고적복구추진위원회(古跡復舊推進委員會)를 조직(組織)하여 문화재(文化財) 지정(指定)을 추진(推進)한 바 병진년(丙寅年)[1986]에 소공대비(召公臺碑)가 문화재자료(文化財資料) 제(第)107호(號)로 지정(指定)되었다. 무진년(戊辰年)[1988] 육월(六月) 팔일(八日) 삼척군(三陟郡) 주관(主管)으로 비각(碑閣) 중건(重建) 기공식(起工式)을 올린 후(後) 동년(同年) 구월(九月) 십일(十日) 준공(竣工)을 보게 되었다. 그 후(後) 경오년(庚午年)[1990] 십이월(十二月) 이십사일(二十四日) 태풍(颱風)으로 비각(碑閣)이 전도(顚倒)되면서 비체(碑體) 상단(上端) 부분(部分)이 완전(完全)히 부러졌다. 이듬해 신미년(辛未年) 삼월(三月) 문화재관리국(文化財管理局) 문화재연구소(文化財硏究所)에서 부러진 비체(碑體)를 접착(接着)시킴으로써 원상복구(原狀復舊)되었다. 지속적(持續的)인 비(碑)의 보존관리(保存管理)를 위(爲)하여 군(郡) 예산(豫算) 금이천육백만(金二千六百萬)원을 지원(支援)하여 계유년(癸酉年)[1993] 육월(六月) 십오일(十五日) 비각(碑閣) 중건(重建) 사업(事業)에 착수(着手) 동년(同年) 구월(九月) 칠일(七日) 준공(竣工)을 보았으니 공(公)의 은덕(恩德)을 추모감패(追慕感佩)하여 천추만대(千秋萬代)에 전(傳)하리.
서기(西紀) 일구구사년(一九九四年) 시월(十月) 구일(九日)
성균관전학(成均館典學) 장헌경(張憲敬) 근찬(謹撰)
일죽(一竹) 홍태의(洪泰義) 서각(書刻)
[의의와 평가]
삼척 지역에 있는 다른 공덕비와 달리 원래 대(臺) 형태로 쌓은 것을 강원도에 부임한 황희의 후손들이 관련 내용을 자연석에 새겨 비석 형태로 세웠다는 점에서 다른 선정비를 세운 사례와 구분된다. 그리고 원덕읍 산양리에는 원덕 지역 유림들이 주도하여 황희를 기리는 산양서원을 세웠다. 이는 원덕 지역 사람들이 황희의 선정에 대한 감사함을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상기하고 있음을 잘 보여 주는 사례이다. 1986년 5월 23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강원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