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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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廣洞里金玉僉員不忘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광동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도현 |
건립 시기/일시 | 1870년(고종 7) - 삼척 하장면 광동리 금옥첨원불망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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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복원 시기/일시 | 1984년 - 삼척시 하장면 광동리 금옥첨원불망비 보수 |
현 소재지 | 삼척 하장면 광동리 금옥첨원불망비 -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광동리 입구 |
성격 | 공덕비 |
[정의]
강원도 삼척 하장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펼친 구휼 활동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
[개설]
금옥첨원불망비는 삼척 하장 지역의 유력 인사들이 백성들을 구휼한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1870년(고종 7) 금옥첨원비를 세웠다. 현재 세워진 비석은 1984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비문 내용은 그동안의 비석 중건 과정과 현재 비석을 다시 세운 경위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건립 경위]
1870년(고종 7)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재물(財物)을 희사하여 백성들을 구휼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금옥첨원불망비(金玉僉員不忘碑)이다. 그런데 이 비는 1913년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면서 이를 애석하게 여겨 1918년에 중건하게 되었다. 이후 비각 건물이 퇴락하여 1984년에 현재 형태로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른다.
[위치]
금옥첨원불망비는 현재 삼척시 하장면 광동리 입구에 세워져 있다.
[형태]
금옥첨원불망비는 ‘금옥각(金玉閣)’이라 쓴 편액을 건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비석은 뚜껑돌[개석(蓋石)] 없이 비신(碑身)과 비좌(碑座)만으로 만들었다. 비의 윗부분은 평면으로 되어 있고, 사각형[방형(方形)]의 비좌는 매우 높게 만들었다. 비좌의 4면에는 비각을 정비하고 비석을 세우는데 기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겼다.
[금석문]
〈전 면〉
금옥첨원불망비(金玉僉員不忘碑)
〈후 면〉
금옥첨원불망비각중건서(金玉僉員不忘碑閣重建序)
본(本) 금옥첨원(金玉僉員) 불망비각(不忘碑閣)은 상고(上古) 경오(庚午) 서기(西紀) 일팔칠십년(一八七十年)에 숭정(崇政) 가의(嘉義) 가선(嘉善) 통정(通政) 위장(衛將) 감찰(監察) 봉사(奉事) 등(等) 제선공(諸先公)이 구재이방민(鳩財以防民)큳하야 기공(其功)이 가창무비(可彰無比)라 이차립갈건각(以此立碣建閣)하야 이조후세(以詔後世)라가 계축(癸丑) 서기(西紀) 일구일삼년(一九一三年)에 실화소진(失火燒盡)하니 석재(惜哉)라 불가민멸고(不可泯滅故)로 개국(開國) 오이칠년(五二七年) 무오(戊午) 서기(西紀) 일구일팔년(一九一八年)에 개간중건(開刊重建)하야 이표전공지유적언(以表前功之遺蹟焉)이러니 세월기구(歲月旣久)에 풍우태습(風雨太襲)하야 지어괴멸(至於壞滅)호대 전화미휴(戰禍未休)하고 사회불안(社會不安)이 연기불절(延起不絶)하야 유수불접보퇴(有誰不接補頹)하니 차호(嗟乎)라 금세(今世) 물질문명(物質文明)은 고도성장(高度成長)하고 전통문화(傳統文化)의 정신영량(精神靈糧)이 유유부족(猶有不足)하야 개연우차(慨然于此)하고 유지제씨(有志諸氏) 합어중구(合於衆口)하야 홍피협찬(弘被協讚)으로 개갈이각(改碣移閣)하고 계지선인제민유덕(繼之先人濟民遺德)하야 승교후인숭덕애향지심(承敎後人崇德愛鄕之心)하노니 일체향민(一切鄕民)은 대동화합(大同和合)하고 청풍정토(淸風淨土)하야 필성선진조국창건지초(必成先進祖國創建之礎)에 의각면려의(宜各勉勵矣)어다. 구비(舊碑)는 매치계전(埋置階前)하고 유공역원급협찬제사(有功役員及協讚諸士) 열기별단(列記別段)하노라.
서기일구팔사년갑자사월(西紀一九八四年甲子四月) 일근수(日謹竪)
[의의와 평가]
삼척 하장 지역의 뜻있는 사람들이 19세기 중·후반에 지역 주민 구휼을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였는지를 자세하게 잘 알려 주는 공덕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