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3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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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陽野山烽燧址 |
영어공식명칭 | Beacon Fire Station of Mt. Yangyas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덕산리 산11-1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도현 |
현 소재지 | 양야산 봉수지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덕산리 산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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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봉수 |
양식 | 연대형 |
[정의]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덕산리에 있는 봉수터.
[개설]
양야산 봉수는 근덕 해안으로 침투해 오는 적에 대한 방어와 연락 체계를 갖추어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밤에는 횃불을 들고 낮에는 연기를 피우는 방법으로 주요 사항을 전달함으로써 주변 마을 주민들에게 빠르게 알림과 동시에 경비, 통신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한 국방상의 중요한 시설이 있던 곳이다.
『세종실록』의 「지리지」에 삼척도호부 소속 양야산 봉화(陽也山烽火) 명칭으로 북으로는 광진산에 응하고 남으로는 초곡산에 응한다고 하였다. 이후 편찬된 각종 지지의 내용도 이와 유사하다.
양야산 봉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통천의 금란성 봉수(金幱城烽燧)에서 1거 직봉인 회양의 소산 봉수(所山烽燧)와 2거인 영덕대소산 봉수(大所山烽燧)에서 안동의 봉지산 봉수(烽枝山烽燧)로 연결되는 보조 봉수 역할을 한 총 38기의 간봉과 연결되어 있다. 형태와 기능 면에서 해안 지역에 주로 설치된 연변 봉수로 볼 수 있다. 당시 연변 봉수는 단순한 통신 기능만을 한 것이 아니라 자체 방어와 지역 주민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경보 기능을 함께 수행하였다.
조선 후기에 양야산 봉수의 기능이 폐지된 이후 마을 주민 가운데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봉수의 연대 옆에 감실을 설치하고 봉할머니당이라 하여 어민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신앙 처소로 이용하고 있다.
[건립 경위]
1446년(세종 28)에는 봉수의 중요성에 비추어 각도 연변 연대의 축조 법식과 중부 봉화의 배설 제도 등이 의정부에 의하여 건의되어 이듬해인 1447년(세종 29) 연변연대조축지식(沿邊煙臺造築之式)과 복리봉화배설지제(腹裏烽火排設之制)가 동시에 마련되고 시행됨으로써 구체화한 연변 봉수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고려 말 왜구 침입 등 외적의 침입이 자주 발생한 삼척 지역 다섯 곳에 이러한 지침을 반영하여 연변 봉수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통신 편의와 해안 방어를 위하여 양야산에 봉수를 설치하였다.
봉수대 초축은 고려 말~조선 전기로 보인다. 폐지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 삼척 지역에 왜구로부터의 피해가 거의 없었고, 북변에 있는 여진족(만주족)이 삼척 지역까지 침입하지는 않았다는 사실과 『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에 기록된 삼척부사 류시회(柳時會)[1562~1635]의 재임 중인 1626년(병인년)에 영동 지역의 봉대(烽臺)를 폐지하였다는 기록,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삼척의 봉수는 폐지되었다고 한 기록 등을 종합하면 인조 때인 1626년(인조 4)에서 『여지도서(輿地圖書)』가 편찬된 18세기 중엽 사이로 여겨진다.
[위치]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덕산리 산11-1 일대 남애포 뒷산의 봉화산[71.9m] 봉우리에 위치한다. 동쪽은 동해 연안에 인접하며 남쪽과 북쪽으로 근덕의 초곡산 봉수와 삼척의 광진산 봉수가 잘 보이는 곳이다.
[형태]
양야산 봉수는 삼척 지역의 다른 봉수와 비교하면 넓은 정상부를 최대한 이용하여 연대와 부속 시설을 갖춘 것으로 보이며, 방호벽이나 호참의 성격이 완전치 않아서 연대형(煙臺形) 봉수라 할 수 있다.
[현황]
1기의 연대(煙臺)는 석축으로, 현재 북서쪽으로 돌무지가 쏠리면서 무너져 원형이 일부 훼손된 상태이다. 연대 남서쪽으로 하단부가 일부 남아 있다. 평면 형태가 사각형[방형(方形)]의 단봉이다. 상부는 크게 훼손되어 연소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남쪽의 급사면에 동서 장축의 능선 상으로 길이 11.1m, 너비 2.2m, 깊이 0.4m의 호가 있다. 그러나 봉수를 쌓을 때 설치한 것인지 후대에 쌓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연대 남서쪽에는 토축의 방호벽(防護壁)이 둘러져 있다. 연대 남쪽 추정 건물지 흔적이 보인다.
양야산 봉수의 기능이 폐지된 후 마을 내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연대의 동쪽 경사면에 봉할머니당이라 불리는 감실을 만들어서 어민들의 신앙 처소로 활용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대체로 형태가 잘 남아 있다는 점에서 동해안 지역의 연변 봉수를 연구하고 분석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봉수 기능이 폐지된 이후 봉할머니당이라 불리는 감실을 설치하여 어민들의 제의 처소로 여겨서 바다에서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장소로 기능한다는 점은 양야산 봉수가 위치한 근덕면 덕산리 마을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