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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645
한자 金尙台
영어공식명칭 Kim Sangtae
이칭/별칭 상호,경륙,경대,백우,양백대장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청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4년(고종 원년)연표보기 - 김상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5년(고종 32) - 김상태 의병 모집하여 영월 단양 풍기 등지에서 일본 수비군 격퇴
활동 시기/일시 1905년(광무 9) - 김상태 정운경의 봉기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07년(융희 원년) - 김상태 이강년을 의병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중군장이 됨
활동 시기/일시 1908년(융희 2) - 김상태 의병 대장이 됨
활동 시기/일시 1911년 6월 14일 - 김상태 피체
활동 시기/일시 1911년 8월 31일 - 김상태 대구공소원에서 사형 선고 언도
몰년 시기/일시 1911년 9월 21일연표보기 - 김상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김상태 건국훈장국민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상태 건국훈장독립장 추서
출생지 김상태 출생지 -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
거주|이주지 김상태 이주지 -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옥동리[하동면은 2019년 10월 20일 김삿갓면으로 명칭 변경]
묘소 김상태 묘소 - 충청북도 제천시 고암동 산28-9 순국선열 묘역
성격 한말 의병장
성별
대표 경력 의병 대장

[정의]

개항기 삼척 출신 의병장.

[가계]

김상태(金尙台)[1864~1911]의 본관은 삼척(三陟)이며, 본명은 상호(尙鎬)이다. 자는 경대(景大)경륙(景六)이고, 호는 백우(白愚)이다. 아버지는 김병규(金丙奎)이다.

[활동 사항]

김상태는 1864년(고종 원년)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태어났다. 장성한 후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하동면은 2019년 10월 20일 명칭이 김삿갓면으로 변경됨] 옥동리로 이주하였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의병을 모집해 영월, 단양, 풍기 등지에서 일본 수비군을 격퇴시켰다. 김상태는 처음에 이강년(李康秊)[1858~1908] 의병 부대와 함께 문경에서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1896]을 처단하는 등 기세를 크게 떨쳤다. 그 후 김상태는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柳麟錫)[1842~1915]이 이끄는 제천의 호좌의진에 합류하여 싸웠다. 김상태는 호좌의진이 북상한 이후 유인석을 좇아 3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으며, 백두산 주변과 무송·임강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김상태는 귀국하여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이강년과 서로 의지하다가 1905년(광무 9) 정운경(鄭雲慶)[1861~1939]의 봉기에 참여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7년(융희 원년) 고종의 퇴위와 그 뒤에 이은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봉기한 원주 진위대의 무기를 얻어 사군 지역[제천·청풍·단양·영춘]의 병력을 모아 스스로 이강년을 의병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중군장이 되어 다시 의병 활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문경 갈평을 비롯하여 영월·서벽·풍기·죽령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1907년 백자동 전투에서는 매복 작전을 전개하고 진군해 오던 200명 규모의 일본군을 기습하여 부대장을 포함한 적군 11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와 물자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의병 피해는 전사자 3명이 발생하였다고 『운강선생창의일록(雲岡先生倡義日錄)』에 나온다.

1908년에 이강년이 체포되어 순국하자 그 의병부대는 중군장 김상태를 의병 대장으로 삼아 1911년 여름까지 일월산·태백산·소백산 일대를 무대로 항전을 이어 갔다. 김상태는 태백산과 소백산의 ‘백’을 취한 양백대장군(兩白大將軍)으로 불렸다. 김상태는 이강년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죽어서 이강년을 만날 수 없다고 하면서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점된 뒤에도 굴하지 않고 영남과 호남 간을 유격하여 수삼 년에 이르렀다.

1911년 6월 14일 오전 1시[지금까지는 1911년 5월에 체포된 것으로 알려져 왔음]에 자신의 종사[비서]였다가 일제의 회유에 넘어간 밀정 우종응(禹鐘應)과 장복구(張復龜) 등에게 속아 일본군 육군 보병 대위 무나카타 겐[宗片謙]이 이끄는 특별 체포조에 의하여 순흥군 연화동상단곡(上丹谷)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된 뒤에도 의병의 기상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였음이 무나가타 겐 대위의 보고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무나가타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김상태 부대의 부하는 900명 정도, 총은 700정이었다. 이후 ‘강도 및 강도 와주범(窩主犯)’으로 8월 31일 대구공소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마지막까지 기개를 잃지 않다가 9월 21일 대구감옥에서 50세를 일기로 단식 순국하였다. 김상태는 아들 김원기(金源箕)에게 유언하기를 이강년의 무덤 곁에 묻어 주면 황천에 가서도 서로 의지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제천의 두학 장치미에 묻혔다. 제천 지역 유림은 봄, 가을로 의사를 모시는 제사를 올렸다. 이강년의 묘는 나중에 문경 쪽으로 이장되었다.

새로 발굴된 자료인 ‘적괴 김상태 체포전말(賊魁金尙台逮捕顚末)’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작성자: 일본군 대위 무나카타 겐[宗片謙]

작성 기간: 1910년 11월~1911년 6월

주요 내용: 김상태 체포 작전 당일 상황

작전 계획: 체포조는 하사 이하 2년병 13명으로 구성, 복장은 경무장, 식량은 주먹밥

특별 수칙: 최대한 근접하여 병졸 5명으로 미리 퇴로를 차단하고 나머지 전 병력이 기습해서 체포할 것, 어떤 경우[절벽이나 바위에서 추락]에도 소리를 내지 말 것, 명령 없이는 죽더라도 사격하지 말 것, 불시에 발생하는 사건은 모두 중대장이 결정하며 절대 독단 행동을 허용하지 않음.

[묘소]

1984년 11월 제천시가 ‘의병묘역성역화계획’에 따라 조성한 고암동 순국선열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국민장(建國勳章國民章), 1990년 건국훈장독립장(建國勳章獨立章)이 추서되었다.

지금은 김상태 의병장 추모 제향과 문화제[추진위원장 주인섭]가 김삿갓면 옥동리에 있는 충절사와 김삿갓면 사무소 광장에서 지역 주민, 학생, 군인, 공무원 등이 참가한 가운데 열려 김상태 의병장의 살신보국 정신을 기리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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